[명시 산책] 파블로 네루다 <망각은 없다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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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파블로 네루다 <망각은 없다 (소나타)>

by 브린니 2020. 7. 21.

망각은 없다 (소나타)

 

 

혹시 내게 어디서 있다 왔느냐고 물으면

난 “그저 우연히 그렇게 왔습니다” 정도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돌들이 검게 물들이는 땅바닥이라든지,

흘러가다 스스로를 파멸해가는 강이라든지,

그런 이야기밖에는 할 말이 없다.

내가 아는 거라곤 새들이 잃고 가는 사물들밖엔 없다.

뒤에 남기고 온 바다라든지 거기 울고 남아 있는 내 누이.

왜 그렇게 많은 지방들이 있는 걸까? 왜 하루는

또 다른 하루와 합쳐지는 걸까? 왜 하나의 검은 밤이

입 속에 쌓여 있는 걸까? 왜 죽음이 이토록 많은가?

혹시 내게 어디서 온 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저 부서진 사물들에게 물어봐야 된다,

너무나도 쓰라린 도구들과

흔히 썩어 있는 커다란 짐승들

그리고 고뇌에 가득한 내 심장과 이야기를 해봐야 된다.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라지만 그것은 기억이 아니다

망각 속에 잠드는 누르스름한 비둘기도 아니다,

그것은 눈물 젖은 얼굴들,

목구멍에 대고 있는 손가락,

그리고 잎사귀에서 무너져 내리는 그런 것.

즉, 흘러간 하루가 남기는 어둠

우리의 슬픈 피를 먹고 살아간 하루.

 

여기 바로 오랑캐꽃이, 제비들이 있다,

여기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

꼬리 긴 달콤한 엽서에 나오는

시간과 감미로움이 산보하는 모든 것.

 

그러나 우린 그 이빨들이 있는 곳, 더 이상은 들어가지 말자,

침묵이 쌓아가는 껍질들을 더 씹지 말자,

왜냐하면 난 무어라 대답할 바를 모르니까 :

정말 너무 많은 주검이 있다,

빨간 태양이 부셔놓은 수많은 뚝이 있다,

뱃전을 치는 수많은 머리들이 있다,

입맞춤을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손들이 있다,

그리고 정말이지 잊고 싶은 그 많은 것들이 있을 뿐.

 

          ―파블로 네루다(칠레, 1904-1978)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

 

 

【산책】

과거는 미래에 닿아 있다.

모든 질문은 과거에 갇혀 있다.

 

아무도 미래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미래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수많은 질문들이 과거를 향해 쏟아진다.

이력서를 수없이 써야 한다.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너는 무엇을 하였느냐,

너는 뭘 잘 하느냐,

 

과거에 대한 질문은 길고, 대답 역시 길어야 하지만 짧다.

과거는 잊고 싶은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신께서는 인간의 겸손을 위하여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다.

 

많은 남미 국가들처럼 칠레 역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눈물 젖은 얼굴들,

……

우리의 슬픈 피를 먹고 살아간 하루.

 

그러므로

 

혹시 내게 어디서 온 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저 부서진 사물들에게 물어봐야 된다,

부서진 사물들이 아니라 부서진 사람들처럼 읽힌다.

 

혹시 내게 어디서 온 거냐고 묻는다면 ……

고뇌에 가득한 내 심장과 이야기를 해봐야 된다.

 

과거의 하루하루, 과거의 사건들은 결코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새겨져 있다.

그 기억들은 다음날의 고뇌로 이어진다. 고뇌로 가득 찬 날들.

심장에 고뇌가 새겨진다.

 

하지만 오늘 지금 여기 서 있는 곳에서 삶을 가꾸어야 한다.

 

여기 바로 오랑캐꽃이, 제비들이 있다,

여기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

꼬리 긴 달콤한 엽서에 나오는

시간과 감미로움이 산보하는 모든 것.

 

그러나

 

정말 너무 많은 주검이 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살아남은 자들은 슬픔을 지닌 채 삶을 계속한다.

 

개인이나 공동체에겐 잊고 싶은 역사가 있다.

그러나 잊는다면 더 이상 역사가 아니다.

 

역사를 결코 잊을 수 없기에 기록되고, 후대에 전해진다.

슬픔이 슬픔에게, 죽음이 또 다른 죽음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오랑캐꽃 : 제비꽃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 제비꽃·병아리꽃·앉은뱅이꽃·장수꽃·씨름꽃이라고 불린다. 4∼5월에 잎 사이에서 5∼20㎝의 꽃대가 몇 개 나와서 끝에 짙은 자주색 꽃이 핀다. 학명은 Viola mandshurica W.BECKER.이다.

제비꽃이라는 이름은 꽃모양이 아름다워서 물찬제비와 같다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고, 병아리꽃이나 앉은뱅이꽃은 식물체가 작고 귀엽다는 데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오랑캐꽃이라는 이름은 꽃의 기부에서 뒤로 길게 나온 부리의 모습이 오랑캐의 머리채와 같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제비꽃 : 오랑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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