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나는 운명>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명시 산책]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나는 운명>

by 브린니 2020. 7. 22.

나는 운명

 

 

그래, 난 어느 때보다도 너를 사랑했다.

 

왜 네 입술에 키스할까?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안다면.

사랑함이 단지 삶을 망각하고,

현재의 어두움에 대한 눈감음이

육체의 반짝이는 경계를 열어제치는 것임을 안다면.

 

난 책에서 물처럼 조금씩 조금씩 올라오는 진리를 읽고 싶지 않다

난 어디서든지 산들이 부여하는 그런 거울,

내가 그 감각을 알지 못하는 새들이 가로지른

내 이마를 비추는 벌거숭이 바위를 단념한다.

 

난 산다는 부끄러움에 몸을 물들인 물고기들이 자신의 열망의 한계

기슭을 습격하는 강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겠다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이 봉기하는 강가, 수선화들 사이로

몸을 내던진 내가 이해 못하는 기호가 판치는 그 곳.

 

난 원치 않는다, 결단코, 그런 먼지, 그런 고통스런 대지, 그런 물어뜯긴 모래, 육신이 성체를 건네주는

산다는 것에 대한 그런 확신을 삼키기를 단념한다

세계와 이 육체가 천상의 눈이 알지 못하는

그런 기호로서 굴러다님을 이해할 때에.

 

결코, 난 외치고 싶지 않다, 혀를 높이 올리고 싶지 않다

높은 곳에서 파열되는 그런 돌멩이, 아무도 삶의

수런거림을 듣지 못하는 그런 거대한 하늘의 유리들을

깨뜨리는 돌멩이처럼 혀를 투사하고 싶지 않다.

 

난 살고 싶다, 단단한 풀처럼 살고 싶다

수사슴 아니 눈처럼, 밤샘하는 숯처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미래처럼

달이 알아채지 못할 때 연인들의 만남처럼.

 

난 그토록 많은 머리카락 아래로

신비스런 비행 속의 세계를 만드는 음악,

날개에 피를 묻힌 채 짓눌린 가슴속에서

죽어갈 순진한 새이다.

 

난 사랑하는 모든 이를 소환하는 운명,

모든 사랑하는 반쪽들이 중심을 찾아

웅성대며 한통속의 장미처럼 선회하는 원으로

물결을 일으키며 다가올 유일한 바다이다.

 

난 갈기를 불살라 벌거숭이 바람에 대항하는 말이다

난 자신의 길다란 머리칼에 고통당하는 사자,

하찮은 강을 두려워하는 산양,

밀림을 싹쓸이하는 호랑이 제왕,

낮에도 빛을 발하는 쬐그만 풍뎅이다.

 

아무도 살아 있는 자의 현재를 모를 수 없다

아우성치는 화살들 가운데 서서

바라봄을 막을 수 없는, 자신의 밝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수정이 되지 않는 그런 투명한 가슴을 보여주는 자의 현재를 .

그건 그대들이 그대들의 손을 가까이하면 핏줄기를 느낄 수 있기에.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스페인, 1898-1984) *1977년 노벨문학상 수상

 

 

【산책】

사람들은 사실 운명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말하지 않는다.

정말 운명을 운명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불행이 닥칠 때 가끔 운명을 탓하기도 한다.

자기 생을 비관할 때 운명을 원망할 뿐,

사실 그렇게 진지하게 운명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런 고민 없이, 운명이란 그저 사전속의 단어 정도로 생각한다.

기구한 운명이니, 기막힌 운명이니, 하면서 텔레비전 드라마나 인생극장 같은 걸 보면서 몇 마디 지껄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과연 운명은 그저 이런 저런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용의자 정도에 불과한 것일까.

정말 운명이란 것이 있어서 인간의 사랑을 좌지우지 하는 것일까.

남녀의 만남이나 사랑과 연애, 결혼과 한 생명의 탄생 등에 관련하여 운명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사실일까.

 

운명은 정해진 것일까, 결정적인 때 바꿀 수 있는 것일까.

운명이란 여러 갈래 길이 있어서 사람의 선택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일까.

 

프로스트의 시 <가보지 않은 길>에서처럼, 아니 그 시와 다른 의미로

운명이란 오히려 ‘가보지 않은 길’이 아닐까.

운명은 따로 있는데 사람은 도리어 운명과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운명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운명과 반대편이거나 빗나간 방향대로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난 사랑하는 모든 이를 소환하는 운명,

모든 사랑하는 반쪽들이 중심을 찾아

웅성대며 한통속의 장미처럼 선회하는 원으로

물결을 일으키며 다가올 유일한 바다이다.

 

정말 운명은 유일한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로 묶는 끈일까.

 

산다는 것에 대한 그런 확신을 삼키기를 단념한다

 

운명은 인생에 대해 아무런 확신도 주지 않는데 왜 운명이 있다고 믿어야 할까.

지금 나의 인생이 운명의 길을 따라 잘 걷고 있는지 운명에서 비켜달아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생을 다 살고 나서 아, 이게 운명적 삶이었구나,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설령 그것이 운명에 의해 살아왔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운명의 존재를 확인해줄 수 있단 말인가.

운명이 있든 말든 어차피 사람의 인생은 시작하고 끝나는 것인데 말이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아내와 자식,

과연 운명일까?

운명이 아니라면 또 무엇인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차라리 모든 게 다 운명인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므로 운명이 키스할 때 고개를 돌리지 마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