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행숙 <해변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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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행숙 <해변의 얼굴>

by 브린니 2020. 7. 18.

해변의 얼굴

 

 

얼굴로부터 넘친 얼굴,

나는 당신이 모르는 표정을 짓지만

 

내 얼굴엔 무언가 빠진 게 있을 거야.

 

코로부터 넘친 코, 코에서 코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면 결국 코가 없고

귀로부터 넘친 귀, 귀에서 귀까지 귀를 막고 뛰어가면 세상은 온통 귓속 같고

입을 꽉 다물면 이빨은 자라지 않고, 편도선은 부풀지 않는가. 거품은 일지 않는가.

 

사진 속의 파도처럼 내 혀는 꼬부라져 있네.

얼굴을 침실처럼 구미고, 커튼을 내리고, 나는 혀를 달래서 눕히네. 나는 사탕 같은 어둠을 깔고

 

나는 당신이 모르는 표정을 짓지만

내 얼굴엔 무언가 남아도는 게 있을 거야.

 

여관 여주인처럼 자다 깨어, 자다… 열쇠를 건네네.

빈방 같은 눈동자

소파 같은 입술

그리고 샤워기 밑에서 50분 동안 비 맞고 서서

 

얼굴로부터 넘치는 저 얼굴,

닮은 얼굴을 하고 비를 피하네.

 

얼굴을 차양같이 꾸미고

그리고 오늘은 얼굴을 베란다같이, 해변같이, 모래알같이 꾸미고

 

                                                                                  -김행숙

 

【산책】

해변에는 사람들,

새들, 물고기, 조개, 등등 산다.

 

해변에는 묘지도 있고,

바람을 막는 나무들,

그 사이를 지나는 사람들이 있다.

 

해변을 끼고 좀 더 걸어 나오면 여관들이 있다.

40대부터 60대까지 여주인이 주로 앉아 있다.

졸거나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여관방의 키에는 긴 플라스틱 바가 달려 있다.

옛날엔 그랬다.

 

여관방에 누워 천장을 보면 누렇게 번진 자국이 있다.

거울을 보면 얼굴이 뒤틀려 보인다.

 

술을 마셔서 부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거울이 얼굴을 망가뜨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코로부터 넘친 코,

귀로부터 넘친 귀,

 

입술은 웃고 있는데 한쪽만 웃는다.

뺨이 부풀어 있는데 한쪽만 빨갛다.

 

여관방에는 달력이 있다.

그냥 숫자만 크게 쓰여 있기도 하고,

벌거벗은 여인이 가릴 곳만 가리고 앉거나 서 있고,

파도가 시원하게 바위를 때리는 장면이거나

그리스나 터키, 지중해풍의 해변과 파란 지붕을 얹은 흰 집들도 박혀 있다.

 

여관방에는 침대가 있기도 하고,

그냥 맨바닥에 이불이 깔려 있기도 하다.

여기서 잠이 올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옛날엔 그랬다.

펜션이나 모텔 등이 없을 때 말이다.

 

사진 속의 파도처럼 내 혀는 꼬부라져 있네.

얼굴을 침실처럼 구미고, 커튼을 내리고, 나는 혀를 달래서 눕히네. 나는 사탕 같은 어둠을 깔고

 

이제 잠들어야 한다.

깊이, 깊이, 잠에서 깨지 말아야 한다.

꿈도 꾸지 않고…

잠에서 깨면 얼굴이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얼굴을 차양같이 꾸미고

그리고 오늘은 얼굴을 베란다같이, 해변같이, 모래알같이 꾸미고

 

존재로부터 모자라거나 남는 것이 있다.

과잉이거나 결핍이거나

과유불급의 세계가 있다.

아무리 딱 맞게 잘 꿰어 맞추려고 해도 넘치는 잉여.

 

얼굴로부터 넘치는 저 얼굴,

 

뭔가 삐져나오는 무엇,

그것이 사람을 거북하게 한다.

 

삐져나온 얼굴을 얼굴에 잘 끼워 맞춰 넣자.

존재의 빈 곳을 넘치는 무엇으로 잘 가려보자.

 

얼굴은 얼굴이 아니라 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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