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시라이시 가즈코 <손바닥>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명시 산책] 시라이시 가즈코 <손바닥>

by 브린니 2020. 7. 15.

손바닥

 

 

손바닥은

큰 방

여러 가지 운명의 지도를 그린

넓고 따뜻한

세계

 

저 사내의 손바닥에

감싸이면

어느덧 내게도

나는 보이지 않고

 

손바닥에서 헤어지면

나는 갑자기

세계 밖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끈 잘린 유성流星이 된다

 

                                      ―시라이시 가즈코(1931- )

 

 

【산책】

사랑은 손을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손을 잡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던 시대는 정말 옛날이 되었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손을 잡을 때 비롯된다.

손을 잡을까 말까 할 때의 설렘과 조바심.

 

타이밍을 놓쳐 며칠을 기다리기도 하고,

살짝 건드렸는데 오히려 상대가 내 손을 꽉 잡았을 때의 놀람과 흥분.

 

길을 걸으며 숲에서 산책을 하며 버스 안에서 극장에서

손은 손을 찾아 헤맨다.

 

손을 마주 잡고 손바닥을 쓸기도 하고 손등으로 부딪히기도 한다.

 

손의 안쪽으로 뺨을 어루만졌을 때와 손등으로 뺨을 쓸어내릴 때의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가.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를 쓸어올릴 때와 풀어내릴 때의 두근거림을,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저 사내의 손바닥에

감싸이면

어느덧 내게도

나는 보이지 않고

 

손은 시작이며 끝이다.

손은 잡았을 때 시작된 사랑을 손을 놓았을 때

손절,

손을 끊을 때 사라진다.

 

손바닥에서 헤어지면

나는 갑자기

세계 밖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끈 잘린 유성流星이 된다

 

손을 씻다. ― 나쁜 짓을 그만두다.

손을 떼다. ― 하던 일에서 빠져나오다.

 

손은 항상 무언가를 갈망한다.

손에 쥐고 싶고,

손에 넣고 흔들고 싶다.

그러나 손을 놓아야 할 때가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가.

 

손에서 빠져나는 물

손에서 흘러내리는 모래

텅 빈 손

 

손은 처음부터 비어 있는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손을 꽉 쥐고 나온다.

 

부부는 손을 놓지 않는 사이다.

잘 때도 손을 꼭 잡고 잔다.

손만 꼭 잡고 잤는데도 아이들 여럿 낳고 잘 산다.

 

손잡고 먼 길을 같이 걸어가자.

사랑하는 이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