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심보선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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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심보선 <형>

by 브린니 2020. 7. 15.

 

 

형은 어쩌면 신부님이 됐을 거야.

오늘 어느 신부님을 만났는데 형 생각이 났어.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나한테 자율성이랑 타율성 외에도

신율성이라는 게 있다고 가르쳐줬어.

 

신의 계율에 따라 사는 거래.

 

나는 시율성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해줬어.

시의 운율에 따라 사는 거라고.

신부님이 내 말에 웃었어.

웃는 모습이 꼭 형 같았어.

 

형은 분명 선량한 사람이 됐을 거야.

나만큼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을 테고

나보다 어머니를 잘 위로해줬을 거야.

당연히 식구들 중에 맨 마지막으로 잠들었겠지.

문들을 다 닫고.

불들을 다 끄고.

 

형한테는 뭐든 다 고백했을 거야.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사는 게 너무나 무섭다고.

죽고 싶다고.

사실 형이 우리 중에 제일 슬펐을 텐데.

 

그래도 형은 시인은 안 됐을 거야.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니까 말이야.

 

이것 봐, 지금 나는 형을 떠올리며 시를 쓰고 있잖아.

그런데 형이 이 시를 봤다면 뭐라고 할까?

너무 감상적이라고 할까?

질문이 지나치게 많다고 할까?

아마도 그냥 말없이 웃었겠지.

아까 그 신부님처럼.

 

시가 아니더라도 난 자주 형을 생각해.

형이 읽지 않았던 책들을 읽고

형이 가지 않았던 곳들을 가고

형이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형이 하지 않았던 사랑을 해.

 

형 몫까지 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끔

내가 나보다 두 살 더 늙은 것처럼 느껴져.

 

그럼 죽을 땐 두 해 빨리 죽는 거라고 느낄까?

아니면 두 해 늦게 죽는 거라고 느낄까?

그건 그때가 돼봐야 알겠지.

 

그런데 형은 정말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사실 모르는 일이지.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가지 않았으리란 법도 없지.

불행이라는 건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까 말야.

 

만약 그랬다면 내가 형보다 더 슬픈 사람이 되고

형은 감옥에서 시를 썼을까?

그것도 그때가 돼봐야 알겠지.

 

형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수두룩했는데

결국 하나도 물어보지 못했네.

 

형 때문에 나는 혼자 너무 많은 생각에 빠지는 사람이 됐어.

이것 봐. 지금 나는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시를 쓰고 있잖아.

문들도 다 열어두고.

불들도 다 켜놓고.

 

형,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왜 형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야?

왜 형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던 거야?

왜 나는 슬플 때마다 둘째가 되는 거야?

 

형,

응?

 

                                              ―심보선

 

 

【산책】

형이 없다.

형이 있으면 좋을까?

형이 있으면 나쁠까?

 

형은 없지만 우리나라에 형님들은 참 많다.

일단 민증 까고, 한 살이라도 많으면 형이 된다.

주로 형님!

 

형은 아버지를 막아준다.

형은 동네 형들을 막아준다.

형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그래서 형이다.

 

아버지가 왕인데 형이 있으면 둘째는 결코 왕이 될 수 없다.

물론 다 죽이면 왕이 될 수도 있다.

 

형은 정말 거추장스런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없는 사람들에게 형은 한번쯤은 있어도 좋은 존재다.

 

 

시가 길어서 타이핑을 그만둘까 하다가 끝까지 버텼다.

이 시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뽑으라면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니까 말이야.

 

시에 대한 정의로 꽤 괜찮은 구절이다.

 

왜 나는 슬플 때마다 둘째가 되는 거야?

 

슬픔을 대하는 태도로서 썩 나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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