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 <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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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앙드레 지드 <좁은 문>

by 브린니 2020. 7. 18.

인간의 사랑이 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앙드레 지드는 <좁은 문>으로 194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도 이 작품은 세계명작으로 꼽히어 꼭 읽어야 할 책 중 하나로 선정되기는 하지만, 막상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목부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성경 구절에서 따왔듯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서양 기독교 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신에 대한 갈망과 인간적 사랑 간의 갈등을 깊이 깨닫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책의 주인공 제롬과 알리사의 고뇌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토록 서로 사랑하면서 무엇 때문에 그리도 다가서지 못하고 서로 각별히 조심하며, 끝내 약혼조차 하지 못하고 외따로 지내다가 쓸쓸히 죽어가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알리사가 동생 줄리엣의 행복을 보면서 인간적 사랑과 행복의 실체에 대해서 회의하는 장면을 보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줄리엣은 사실 알리사처럼 제롬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롬과 알리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고, 알리사가 줄리엣의 마음을 눈치 채고 제롬을 양보하려고 하자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합니다.

 

그 남자는 사업가로서 경제적 능력이 탁월하고 줄리엣을 많이 사랑하고 있었기에 줄리엣은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아이를 다섯이나 낳으며 만족스러운 행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줄리엣의 행복을 바라보면서 알리사는 불만족스럽고 어색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 행복은 너무나 쉽사리 획득되었고, 빈틈없이 ‘들어맞는’ 것이어서 오히려 영혼을 죄고 질식시키며, 진보가 없는 행복이라고 느낍니다.

 

알리사가 바라는 행복은 ‘신성한 기쁨’으로 ‘하나님 안에서 융합되는 것’입니다. 그런 알리사가 볼 때 줄리엣의 행복은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조건을 선택하여 그 안에 안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리사는 줄리엣이 그 결혼생활 안에서 남편의 사업에 관심을 갖고 돕는 일에 몰두하여 더 이상 독서하지 않으며 신성한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말하기를,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은사를 지닌 사람이 있으며, 할 수 있다면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였습니다. 가톨릭에서 신부와 수녀들이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흔히 보통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줄리엣처럼 적당한 조건을 선택하여 그 안에서 해야 할 일상의 일들을 처리하는데 바쁘게 지내게 되므로 신적인 아름다움과 희생과 봉사의 삶을 좇기가 어려워집니다. 또한 먹고 살고 사랑하는 모든 육체적 삶의 요구들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며, 보다 정신적으로 고양된 것들을 추구하는 일들을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여기에 알리사와 제롬의 사랑의 고뇌가 들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시작점부터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는 열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닿는 최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적당한 조건에 맞추어 안주하는 행복은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한없이 드높여 하나님과 융합되는 신성한 기쁨,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그 목표를 삼았기에 ‘좁은 문’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알리사는 어머니의 성적 일탈로 인해 고통스러워 눈물을 흘렸고, 그 고통스런 얼굴을 바라보면서 제롬은 알리사를 향한 연민으로 그녀를 보호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는 사랑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한낱 육체적 사랑에 머무를 수는 없었습니다.

 

제롬 역시 알리사의 고통스런 눈물 속에서 순결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발견하였고, 알리사에 대한 충성으로 보다 숭고하고 성스러운 행복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모든 도덕적인 일들을 행합니다.

 

그는 얄팍하고 세속적인 독서를 하지 않았고, 한층 고결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읽고 외우며 알리사에게 들려줍니다. 제롬과 알리사는 서로가 서로를 향한 뮤즈가 되고 신성한 세계를 열어주는 안내자가 되어줍니다.

 

이러한 모티브는 서양문학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단테가 <신곡>에서 자신의 영혼을 신에게로 인도해줄 구원자로서 베아트리체라는 여성을 상정하였듯, 헤르만 헤세 역시 <데미안>에서 술과 음담패설에 절은 싱클레어를 구원해줄, 산책길에서 만난 여성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정념과 세속에 물든 영혼을 구원해 높은 곳으로 고양시켜줄 구원자를 사랑하는 것은 일종의 ‘거룩한 에로스’입니다. 제롬과 알리사는 거룩한 에로스로서 상대방을 사랑하는데, 현실은 그들에게 ‘결혼’이라는 실체로 다가옵니다. 두 사람은 그 앞에서 매우 곤혹스러워합니다.

 

주변인들은 두 사람에게 ‘약혼’ ‘결혼’이라는 지상의 낱말들을 자꾸 각인시킵니다. 두 사람은 “우리 사이에는 약혼이 필요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과연 그런가 두 사람 다 혼돈스러워합니다. 두 사람은 육체의 열망을 가진 보통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에로스’라는 말의 실체는 상당한 갈등을 내포합니다. 에로스라는 말이 가진 육체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완전하며 신성한 행복을 추구하려면 과연 육체적 에로스가 끼어들 자리가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태초에 지었던 에덴에도 육체적 에로스가 있었을까 하는 문제는 영원한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무도 그곳의 삶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생육하고 번성하라”했으므로 자녀를 낳고 살아가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성관계 없는 출생이 가능한가의 문제부터 다수의 여성과 남성이 살아갈 때 일어날 사랑과 질투의 분쟁이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까지 도무지 그곳의 질서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어쨌든 선악과 이후에 인간은 부끄러워 몸을 가렸고, 사랑과 전쟁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를 향하여 불타는 육체적 열정을 지니게 되었고, 불행히도 그 열정이 일대일이 아니라 마구 엇갈리면서 쟁취하고 빼앗기며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사랑의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그 전쟁통에 승리하여 서로를 얻는다 해도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시들고 말아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게다가 알리사가 “나는 나이가 너무 많아”라고 여러 번 말하듯이 에로스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불타오르므로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에로스’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모순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알리사의 고민입니다. 제롬을 통해서 거룩하고 신성한 사랑을 꿈꾸게 되었고 열망하게 되었지만, 제롬을 사랑하면 할수록 육체성이 그 발목을 잡아 더 이상 높이 올라가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알리사의 일기를 보면 그 마음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아직 어렸을 때 나는 벌써 그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워지고 싶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완전’을 지향했던 것도 그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가 있으면 그 완전한 미덕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것은 오오, 주여! 바로 당신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무엇보다도 저의 영혼을 당황케 하는 것입니다.”

 

알리사의 최종적인 소원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오! 사랑의 힘으로 우리들 두 사람의 영혼을 동시에 사랑을 넘어선 저 건너까지 이끌어갈 수만 있다면!”

 

그러나 알리사의 바람은 이별과 쓸쓸한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알리사의 죽음 이후 제롬은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지내면서 알리사를 추억합니다.

 

어쩌면 두 사람의 사랑은 알리사가 말했듯 서로가 서로에 대한 '환영'만으로 사랑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영원으로 이끄는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단지 산책길에서 마주친 한 소녀를 베아트리체라고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짓고 사랑하면서 스스로 술과 타락한 생활에서 벗어났듯이 알리사도 제롬도 각자의 삶을 숭고하게 살고자 하는 열망을 쏟아 부어 상대방을 기댈 언덕으로 여겼을 뿐 실제로 상대방은 그런 역할을 할 자격도 힘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실체없는 사랑이 향하는 곳은 어디였을까요? 끝내 결혼은커녕 약혼조차 하지 못하고 이별하고 만 그 뜨거웠던 사랑이 진정 원했던 것은, 아마도 한계 많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완전하고 신성한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사랑 노래를 통해서 영원하고 숭고하고 변하지 않는 진실한 행복을 꿈꿔왔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비극이 아니라면 줄리엣의 행복처럼 적당한 조건에 맞추어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만족하기로 결정한 수준에서 끝이 납니다.

 

진정 인류가 뜨겁게 사랑하는 진정하고 영원한 행복, 그것은 죽음의 한계를 넘어야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인 것이며,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토록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고뇌하며 살아갑니다.

 

알리사가 바랐듯 인간적 사랑을 넘어선 그곳에 존재하는 신성한 사랑의 행복과 기쁨이 오늘도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 앞에 서서 그것이 열리기를 하염없이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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