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끄 프레베르 <꽃집에서>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자끄 프레베르 <꽃집에서>

by 브린니 2020. 7. 5.

꽃집에서

 

 

어느 남자가 꽃집에 들어가

꽃을 고른다.

꽃집 처녀는 꽃을 싸고

남자는 돈을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꽃값을 치를 돈을.

동시에 그는

손을 가슴에 얹더니

쓰러진다

 

그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돈이 땅에 굴러가고

그 남자와 동시에

돈과 동시에

꽃들이 떨어진다.

돈은 굴러가도

꽃들은 부서져도

남자는 죽어가도

꽃집 처녀는 거기 가만 서 있다.

물론 이 모두는 매우 슬픈 일

그 여자는 무언가 해야 한다

꽃집 처녀는

그러나 그 여자는 어찌할지 몰라

그 여자는 몰라

어디서부터 손을 쓸지를

 

남자는 죽어가지

꽃은 부서지지

그리고 돈은

돈은 굴러가지

끊임없이 굴러가지

해야 할 일이란 그토록 많아.

 

―자끄 프레베르(프랑스, 1900-1977)

 

 

【산책】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슬픈데 우스꽝스러운 상황. 웃픈!

 

갑자기 여러 가지 상황이 한꺼번에 일어나 어찌할 바를 몰라 엉거주춤할 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때,

우물쭈물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해야 하나 허둥지둥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뿐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

정말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이 나타나 상황을 정리해줘야만 하는 위급한 사태.

그러나 곁에는 아무도 없고, 한꺼번에 터진 일들을 혼자서 정리해야 하는 상황.

 

이럴 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시간이 정지하는 것뿐이다.

 

시간이 정지하고, 눈앞에 벌어진 일들은 꿈에서처럼 슬로우비디오처럼 흘러간다.

수억 년이 지나간 듯 하지만 눈 깜짝할 새 상황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동시에 모든 것이 벌어지는 상황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을 때

인간이라는 기계는 오작동을 한다.

 

모든 회로가 뒤엉키고, 뇌에서는 아무런 명령도 내릴 수 없다.

팔다리는 얼어붙고, 심장은 최고조로 뛴다.

입에서는 단말마가 터져나올 듯 하지만 입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한다.

그저 아아아, 침묵을 외친다.

 

자끄 프레베르의 <꽃집에서>의 꽃집 여자는 이제 뭘 하면 좋을까.

재빨리 119에 신고를 하고, 쓰러진 남자 위에 올라가 손에 깍지를 끼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 안 되면 인공호흡도 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위급상황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인생이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언제든 터질 수 있고, 사실 우리는 무방비 상태일 때가 대부분인데……

 

이런 급박한 상황을 위트 넘치게 써놓은 자끄 프레베르와 같은 시작법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페이소스보다 더한 페이소스? 휴먼페이소스유머 앤 다큐?

'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용미 <가시연>  (0) 2020.07.06
조용미 <붉은 시편>  (0) 2020.07.05
자끄 프레베르 <어린 시절>  (0) 2020.07.04
이민하 <흑백사진>  (0) 2020.07.04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0) 2020.07.0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