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하 <흑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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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이민하 <흑백사진>

by 브린니 2020. 7. 4.

흑백사진

 

 

엄마는 밤새 빨래를 하고

할머니는 빨래를 널고 아버지는 빨래를 걷고

나는 옷들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교복

날이 새도록 세탁기가 돌아도

벽에 고인 빗물은 탈수되지 않고

멍이 든 두 귀를 검은 유리창에 쿵쿵 박으며

나는 계절의 구구단을 외우고

동생은 세 살배기 아들과 기억의 퍼즐을 맞추고

할머니는 그만해라 그만해라 욕실을 들여다보시고

엄마는 죽어서도 빨래를 하고

팔다리가 엉킨 우리들은

마르지도 않는 지하 빨랫줄에 널려

아버지는 나를 걷고

나는 동생을 접고 펴고

동생을 입는다 덜 마른 아버지

 

                                       ―이민하

 

 

【산책】

마음이 먹먹해지는 시다.

덜 마른 옷을 입고 학교에 간 적이 있다.

꿉꿉하고 냄새가 나는 옷을 입고 외출을 한 적이 있다.

 

옷은 그 사람을 나타낸다.

왕은 홍포를 입고,

귀족은 술이 달린 옷을 입는다.

부자는 금빛 옷을 입는다.

가난한 자는 남루한 옷을 입는다.

입은 옷이 그 사람이 된다.

 

“팔다리가 엉킨 우리들은

……

아버지는 나를 걷고

나는 동생을 접고 펴고

동생을 입는다 덜 마른 아버지”

 

옷이 아니라 빨래가 되어 버린 지하방 사람들.

팔다리가 엉켜서 아버지와 나, 동생이 서로를 접고, 펴고, 입는다.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서로가 서로를 입고, 벗고, 펴고, 말린다.

햇볕이 좀 모자랄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삶을 살아간다.

가끔은 뒤엉키고, 싸울지라도.

사람들은 산다.

어디서든.

무엇을 입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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