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병민의 <러브스토리>와 기형도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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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일상생활

길병민의 <러브스토리>와 기형도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by 브린니 2020. 6. 16.

사랑의 이상과 사랑의 현실

 

 

사랑과 이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의 가슴속을 울리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바로 기형도 시인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입니다.

 

많은 이들이 어쩌면 그렇게 한 마디로 쓰라린 가슴을 표현했을까 감탄해마지 않는 그 한 구절로 유명해진 이 시의 제목은 원래 <빈 집>입니다.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사랑을 잃은 자의 가슴은 뜨거웠던 열망과 꿈결 같던 소망을 잃어버린 텅 빈 집과 같습니다. 어디선가 못 다한 사랑이 울고 있겠지만, 그곳은 저세상처럼 멀기만 할 뿐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신기루일 뿐, 텅 빈 가슴은 텅 빈 집에 꽁꽁 갇혀버리고 맙니다.

 

삼류 심야극장의 객석에서 스물아홉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죽었다는 기형도 시인의 믿을 수 없는 짧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는 더욱 이 시에 극적인 요소를 더합니다. 게다가 이 시는 죽기 직전에 발표한 마지막 시였다니 말입니다.

 

그가 보던 영화가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과거에 삼류 심야극장에서는 두 편의 영화를 동시상영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굳이 여기에 영화 <러브스토리>의 주제가 가사를 덧붙여 보는 것은 두 내용의 대비가 극심하나 가슴 아프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팬텀싱어3>를 통해 화제를 모은 베이스-바리톤 길병민은 뛰어난 목소리와 표현력으로, 국제 무대에서 영화 <러브스토리>의 주제가를 불러 국내 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www.youtube.com/watch?v=wucpbDntRW0

 

영화 <러브스토리>는 명문 부잣집의 아들과 이태리 이민 가정의 가난한 여성이 만나 사회적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식을 올리지만, 아내가 백혈병으로 죽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한 로맨스 영화 같아 보이지만 이 영화가 지니는 가치는 신분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보수적인 명문가의 아들이 진보 성향의 가난한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저항의식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제약조차 극복한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은 것은 피할 수 없는 한계, 죽음이었습니다.

 

사랑을 잃은 남자의 노래는 이렇습니다.

 

 

영화 <러브스토리> 주제가

 

Where do I begin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To tell the story of how great a love can be

사랑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the sweet love story that is older than the sea

바다보다 더 오래된 달콤한 사랑 이야기를

the simple truth about the love she brings to me

그녀가 내게 가져다준 사랑에 대한 단순한 진리를

where do I start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With her first hello

안녕이란 첫 인사로

She gave a meaning to this empty world of mine

그녀는 공허한 나의 삶에 의미를 주었지

There'd never be another love, another time

다시 없을 사랑이지, 다시는

She came into my life and made the living fine

그녀가 내 인생에 들어와 내 삶을 아름답게 만들었지

She fills my heart

그녀가 내 마음을 채우네

She fills my heart with very special things

그녀가 내 마음을 채우네, 매우 특별한 것들로

With angels' song, with wild imaginings

천사들의 노랫소리와 격정적인 상상들로

She fills my soul with so much love

그녀는 극진한 사랑으로 내 영혼을 채워주었지

That anywhere I go I'm never lonely

내가 어디로 향하든지 난 절대 외롭지 않아

With her around, who could be lonely

그녀가 곁에 있는데, 그 누가 외로울 수 있을까

I reach for her hand, it's always there

내가 손을 뻗으면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었으니

How long does it last?

얼마나 갈 수 있을까?

Can love be measured by the hours in a day

사랑이 시간으로 측량될 수 있을까

I have no answers now, but this much I can say

나도 당장 대답할 순 없지만,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지

I know I'll need her I'll the stars all burn away

별들이 모두 불 타 없어지는 날까지 난 그녀가 필요하다는 걸

And she'll be there

그녀가 그곳에 있어줄 거라는 걸

 

 

사랑을 잃은 두 남자의 노래가 너무 달라 한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형도 시인의 이별 노래는 공허한 텅 빈 집으로 표현되며 장님처럼 더듬어 문을 잠그는 폐쇄적인 것이라면, 길병민이 부른 <러브스토리>는 도리어 이별로 인해 문을 모두 열어젖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그 별들이 불타 없어지는 날까지 계속되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노래합니다.

 

누구나 이별을 경험합니다. 배신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라면 기형도 시인이 아니라 길병민처럼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을까요?

 

홀로 남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두 경우 다 변함이 없는데, 한쪽은 텅 빈 방에서 문을 잠그고 장님처럼 더듬거리고, 다른 한쪽은 문을 열어젖히고 두 팔을 벌려 밤하늘을 향해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이라고 외치고 있네요.

 

어쩌면 기형도 시인의 시가 훨씬 더 현실적인지도 모릅니다. 시인의 첨예한 날카로움은 그럴 듯한 낭만적 사랑의 이상 따위는 단칼에 베어버립니다. 그래서 너무 아파 남는 건 죽음뿐인지도 모릅니다. 스물 아홉, 그의 젊은 죽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이제 그만! 꿈처럼 닿을 수 없어도 길병민의 <러브스토리>처럼 죽음조차 흔들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온 세상을 다 채워버리고 싶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랑이지만, 언제나 거기에 있다고, 별이 불타 없어질 때까지 사라지지 않으며,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어 절대로 외롭지 않은 그런 사랑이라고.

 

죽었으나 죽지 않은 사랑이 있다고 믿어야 쓰라린 가슴으로도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습니다. 소망은 마치 연극과도 같은 삶을 끌고 가는 단 하나의 돛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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