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S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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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Two Some

by 브린니 2020. 5. 24.

 

 

B가 말했다.

the foot가 발마사지 하는 데야?

아니, 신발가게야.

아, 난 몰랐어.

웃기려고 한 소리야?

웃겼니?

바보 같았어.

 

날씨가 더웠다. 그들은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건너편 멀리 떨어진 빌딩 4층인가 5층에 더푸트샵 간판이 눈에 띄었다. A는 왜 신발가게가 건물 6층에 있는 것일까 의아했다. B는 발을 흔들면서 Die Blendung을 읽다 말다 하고 있었다. Die Blenduing이란 어둠 속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갑자기 마주한 사람의 눈이 순간적으로 머는 현상을 뜻하는 독일어였다. 그 책이 출간된 1935년 독일에서는 나치가 죽음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얼마 뒤 유태계 이민자였던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는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 무렵 프로이트 역시 런던으로 도망쳤다. 추방됐거나 아무튼. B는 벌써 몇 번째 그 소설을 완독하려고 노력중이다. B는 처음에 그 책을 머리 없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머리 없는 세상을 치면 탈모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열된다. 책은 더 이상 이 세상 관심목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도서관이나 서점 홈페이지에서 찾아봐야 한다. 머리 없는 세상은 서점 사이트에는 더 이상 없고, 국립중앙도서관 홈피에서만 현혹 또는 바벨탑이란 부제를 달고 1981년 출간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 책이 그 해 노벨상을 받았는데 부제로 붙은 현혹은 Die Blendung이 Verblendung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 다른 부제인 바벨탑은 영미권에서 출간될 때 붙인 것인데 별생각 없이 이 책에도 갖다 붙인 것 같다. 작가와 작품이 잘 알려진 상황이 아니어서 어떻게 해서든 책을 알리려는 출판의 노고인 셈이다. 지금 B가 읽고 있는 것은 현혹이란 제목을 달고 2007년에 출간된 책이다. 번역자와 출판사 모두 머리 없는 세상과는 다르다. B는 서점에서 책을 보자마자 다시 샀다. 머리 없는 세상을 다 읽지 못하고 잃어 버렸기 때문인데 어쩌면 끝까지 읽지 못하고 10년 넘게 책장에 꽂혀 있는 게 민망해서 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책을 다시 만나자 무척 반가웠으며 잘 팔리지도 않을 책을 두 번째로 출간하는 출판사의 막무가내식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현혹을 다시 읽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2부가 시작되면서 점점 책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이젠 다 읽어야겠다는 의지만으로 그저 손에 닿은 곳에 두고 있을 뿐이다.

 

A가 말했다.

노인이 되었는데도 책 같은 걸 읽나?

눈이 아직 멀지 않았으니까.

눈 영양제라도 먹나?

몇 년 전부터 꾸준히 하루 한 알씩 먹어.

그럼 좀 낫나?

모르겠어. 더 나빠지지는 않는 것 같애.

 

A는 다시 인터넷 기사를 뒤적거렸고 B는 현혹을 읽으려고 애썼다. 카프카에게 노벨상을 주지 못한 위원회가 카네티에게 상을 줆으로써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영어권에서는 왜 이 소설 제목을 ‘바벨탑’이라고 번역했을까. 카프카의 ‘성’을 오버랩한 것일까. 그만큼 현혹은 무슨 이야기를 떠벌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고대 바벨탑이 신이 인간의 언어를 다양하게 흩어버린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걸 상기해보면 이 책의 제목으로 어울릴 듯도 했다. 어쨌든 B는 죽기 전에 이 소설을 다 읽지 못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이 책의 영어권 대표 제목은 ‘화형Auto-da-fa’이다. 중세 시대 배교자나 이교도를 불로 태우는 의식, 바로 그 화형이다. 도대체 이런 제목은 왜 갖다 붙인 것일까. 누가 누구를 왜 부태워 죽인단 말인가. 이 책을 다 읽으면 그 해답이 나올까.

B는 평생 외국어를 잘하지 못해 읽고 싶은 해외 도서를 마음껏 읽지 못한다는 데 늘 안타까워했다. 그렇다고 외국어를 배우려고 애쓸 만큼 부지런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어를 못하더라도 ‘이방인’의 번역본만 읽고도 뫼르소의 인생을 충분히 느꼈다면 된 것 아닌가 자위하면서 부끄러움을 달랬다.

B가 현혹에 꽂아둔 책갈피는 네팔을 다녀온 누군가가 선물한 것인데 누구에게서 언제 어디서 무슨 연유로 받았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것이 네팔에서 왔다는 것도 책갈피 한쪽 면에 NEPAL이라 써 있고, 다른 면에 네팔식 텐트와 네팔 국기와 에베레스트 산이 찍혀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을 뿐이었다. 2007년 어디쯤에선가 누군가가 네팔에 다녀왔고, B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는 그 사람도 잊었고, 그 시간도 잊었다. 지워진 인생의 한 부분이 지금 어디서 떠돌고 있을까.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대를 만들었다. 그들은 멋진 양복을 입었고, 깊이 사색했고, 삶에 대해 열광적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 했으며, 동시에 세계를 파멸로 몰고 갔다. 그들의 시대는 190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과 달리 불꽃으로 가득했다. 포스트 현대는 너무 조용하고, 지루하고 협소하다. 광활한 대지는 접어두고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 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 시대는 정보화 혁명이나 4차 산업혁명 따위의 기계적 비약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인간 혁명이 동반되는 시기였다. 사람들이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토록 깊이 깨달은 적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다른 사람의 낯섦에 놀라고 동시에 그들과 자신이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또 놀라고, 급기야 익숙하지만 너무나 낯선 자기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시대. 1차 세계대전에 비해 2차 대전은 빈약해 보인다. 1차 세계대전이 인류가 자신이 모르고 있던 괴물로서의 얼굴을 타자에게서 발견하고 놀라서 그것을 죽이려고 서로 총질을 해댄 것이라면 2차 대전은 이를 더 끔찍하게 반복한 것이다. 유태인 학살에서 보듯 나치가 벌인 악행은 인간이 발견한 자신의 실재에 대해 깊이 사색하기 전에 자기 속에 있는 괴물의 모습을 강제로 타자에게 투사시킨 어리석은 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Doubling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자기 확인인데 말해 더 뭐하랴. 1, 2차 대전은 여러 모로 인간성에 대한 절망적인 울부짖임이었다는 게 확실하다. 그것이 1800년 후반과 1900년대 초반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한 대가이기도 한 것이다. 카뮈의 ‘이방인’은 이 시기를 거친 인간이 발견한 자화상을 매력적인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카뮈 이후 대부분의 소설의 이방인의 반복일 뿐이다. 카뮈의 ‘이방인’은 전세대 카프카의 혼돈 을 벗어난 명확한 자기 증명이다. 그러므로 카뮈 이후의 작가가 모호한 작품을 쓴다면 카프카를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유행은 반복하고 한 세대는 윗세대를 극복하기 위해 위의 위를 탐색하곤 한다. B는 자신을 뫼르소를 자기 자신처럼 좋아했다. 카뮈는 쉬운 언어로 익숙한 일상 속에 사는 낯선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인류 전체를 이야기했다. 이방인, 어디에도 없으나 모두인 인간. Nobody, Everyman.

 

A가 말했다.

사막에 가 본 적 있어?

아니, 왜?

사막이 태초부터 사막이었는지 아니면 예전엔 다른 것이었는데 기후 변화 때문에 차츰 그렇게 됐는지 궁금해서 말야.

글쎄. 두 가지 다 가능하지 않을까. 근데 그건 또 왜?

얼마 전에 말이야. 지방에 있는 딸네 갔었지. 근데 거기 조상님 무덤이 있다는 생각이 났어.지금은 묘소는 없어지고 누각이 하나 세워졌다는데 거길 가보고 싶은 거야. 주소도 모르고 정자 이름도 생각이 안 나서 고심하다가 딸애가 노트북을 가져다주기에 30분쯤 검색을 해서 드디어 찾아낸 거야. 졸고 있던 사위를 깨워서 앞세우고 대학 다니는 손자까지 끌고 나섰지. 손주 녀석이 도대체 어디에 가느냐고 묻는 거야. 딸애가 아버지 조상님께서 이 지역에 묻히셨는데 지금은 거기 누각이 섰대. 거기 가 보는 거야, 대답했지. 손자가 그러더군. 없는 걸 보려고 거길 가는 거야? 그래서 나도 생각을 해봤지. 내가 보려는 것이 누각인지 조상의 묘인지 말이야.

1911년 루브르에서 모나리자가 도난당했을 때 관람객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지. 그들은 모나리자가 없는 텅 빈 벽을 보는데 비싼 입장료를 냈어. 모나리자가 루브르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별로 모이지 않았어. 사람들은 없는 걸 더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우리 식구들 모두 거길 갔고, 연못도 구경하고 누각을 발견하고 사진도 찍었어. 집에 와서 보니 내 뒤로 ‘영남루’라고 적힌 누각이 서 있고 그 앞에 출입금지 표시가 있더군. 어디 들어가서는 안 될 곳을 밟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막에 가면 그런 느낌일까.

그야 모르지. 나도 한 번도 가본 적 없거든.

 

A와 B는 카페를 나와 잠시 걸었다. 그들 앞으로 음식을 배달하는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온통 검은 색이었는데 앞쪽 가림막에 흰 십자가를 크게 그려놓았고, 뒤쪽에 매단 배달통에는 서기 1년부터 33년 동안 살다가 죽은, 부활한 예수의 초상을 새겨놓았다. 오토바이의 꽁무니를 쳐다보던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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