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시] 첨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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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창작 시] 첨잔

by 브린니 2021. 6. 13.

첨잔

 

 

슬픔에 슬픔을 더 붓습니다

시체를 시체로 덮는 전장 같습니다

마음에 술을 붓습니다

숯불을 쏟은 듯

 

태웁니다

수많은 이유와 변명들을

마른 땅이 쩍 갈라지듯

인생이 세운 가설들이 무너집니다

 

어쩌면 신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생을 허락하셨던 것일까요

 

욕심을 쌓을 창고가 부족해서 숲을 다 태웠습니다

산꼭대기에서 발끝을 들고 하늘을 만져보았습니다

사치와 향락과 도취

어리석음의 끝을 먹고 마셨습니다

 

술이 반쯤 든 잔에 술을 조금 더 부어 마시는 것이 첨잔이라지요

술을 넘치도록 따르는 것은 마음이 비어서일까요

술이 흘러 상을 적시고

몸이 흥건히 젖고

밤이 익고

 

혹 사랑도 깊이 숙성할까 바람을 가져서일까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았으나

단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저기 구석에서 울고 있습니다

인생이 반쯤 달아난 사람이

원망도 복수도 없이 황망히 퇴장하는 사람이

 

혼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임박한 종말입니다

 

슬픈 심판이 스며들어 숨 멎고

마음은 도리어 소금불에 찢깁니다

죽어 누워 있는 몸 위에

마음을 저며 수를 놓고

시체를 장식합니다

 

날마다 새 안녕을!

죽은 뒤 심판을 통과하는 생에게

축복이 퍼부어집니다

 

슬픔에 술을 조금 더 부었을 뿐인데

말들이 저절로 뛰쳐나와 널뛰고 춤추었네요

봄밤이 농밀히 익었으니 꽃 지듯 잠들겠습니다

술 취한 슬픔은 물색없이 깊푸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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