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시] 문득, 없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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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창작 시] 문득, 없어지다

by 브린니 2021. 1. 31.

문득, 없어지다


정지된 시간들이 통째로 흘러갔다
어제는 십수 년 전의 오늘이었다
그날 무슨 사건이 발생하였는가
생생한 일기에서 피가 흐른다

자아가 너무 단단해서 요동하지 않고
노래할 때조차 떨림이 없던 사내를 알고 있다
나이들어서도 그들이 굳건할까 궁금했다
비겁한 그들이, 교활한 혀와 나쁜 뇌가 여전할까도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고 사슴을 부려도
세월은 저만치 서서 사람을 호명한다
과거는 내일에 먼저 가 닿아 매복하고 있다
바람은 한결 부드러워져 마음을 쓰다듬다

불쑥 시간들이 몇 개 튀어나와 난동을 부린다
잊혀지는 사건들은 결코 하나도 없다
기억을 잠재우는 용서의 묘약은 없는가
치유될 수 없는 상처들이 죄악을 부추긴다

뿌리깊은 미움의 나무를 뱃속에서 키우며
안 그런 척 살기 참 쉽다 그렇지 않다
살을 베고 흘러나오는 것은 타인의 피가 아니다
사건이 존재와 뒤엉키는 그날 그 순간

문득
인생에서 절반쯤
없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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