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특별전 2020. 12. 4 ― 2021. 5. 2 서울 강남구 M컨템포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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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일상생활

미켈란젤로 특별전 2020. 12. 4 ― 2021. 5. 2 서울 강남구 M컨템포러리

by 브린니 2020. 12. 7.

디지털로 복원된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주말에 미켈란젤로 특별전에 다녀왔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워낙 큰 대작들을 제작했는데 호텔의 전시관에서 어떻게 전시를 할까 궁금했습니다. 정말 뭔가 특별한 게 있을까?

 

 

 

“타고난 예술적 재능으로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전기 작가 바사리는 미켈란젤로를 이런 말로 칭송했습니다.

 

1475년 3월 6일 피렌체 근처 카프레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 어느 석동 아내에게 맡겨졌습니다. 아버지는 학업에 전념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예술을 고집했습니다.

 

13세 때에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Ghirlandajo)의 화실에서 배웠지만 자신은 조각에 더 소명이 있다고 느껴 이듬해부터 조각가 베르톨도(Bertoldo di Giovanni)에게로 옮겨 조각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1449∼1492)에게 인정받아 그의 집에 체류하면서 인문학자들과도 접촉, 고전문학이나 신구약 성서를 탐독함과 동시에 조각을 위한 인체 해부에도 전념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신의 모습에 따라 인간이 창조되었다면 인간에게도 그 신성이 깃들어 있으며 이상적인 인간의 신체야말로 신성의 구현이라 생각했습니다.

 

 

1487-1488 13세 <성 안토니오의 유혹>을 그렸는데 15세기 독일 화가 마르틴 숀가우어의 <성 안토니오의 유혹>의 구도를 수정하고, 악마들에게 물고기 바늘과 같은 효과를 추가해 환상적이고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1496-1497 <바쿠스>, <성 요한, 천사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 (21-22세)

 

 

1498-1499 <로마의 피에타> (24세)

 

 

미켈란젤로를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으로 이탈리어로 ‘피에타’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으로 미술에서는 마리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려온 아들의 시신을 무릎 위에 안은 채 느끼는 슬픔을 형상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예수의 고통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예수의 상처는 작고, 피가 보이지 않게 전반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성모는 슬픈 표정이지만 차분하게 묘사함으로써 아들의 죽음에 따른 고통을 고귀하게 승화하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총 4점의 <피에타 상>을 제작하였는데 <로마의 피에타>는 첫 피에타 작품으로 24세의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며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서명을 남긴 유일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성모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 안에 피렌체 출신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이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이 작품은 어머니와 아들의 인체 비율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마리아의 무릎은 너무 크고 예수의 신체는 너무 왜소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비율을 의도하였는데 원래 땅바닥에 두려고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위쪽에서 보는 시선을 고려해 작품의 디테일을 구성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들의 죽음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 즉 아버지로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하는 고통과 깊은 사랑을 담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00-1501 <매장>미완성 (25-26세)

 

<매장> 드로잉

1501-1504 <다비드> 26-29세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의 운영위원회에서 주문한 작품으로 양 미간을 찌푸리고 손등의 핏줄을 보여줌으로써 거대한 적을 앞둔 두려움과 용기를 동시를 보여줍니다.

 

미켈란젤로는 비토리아에게 보내는 시 중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최고의 예술가라 해도

대리석에 이미 들어 있지 않은 생각은 알지 못합니다.

지성에 순종하는 손만이 그것을 만질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주로 사용하던 재료는 대리석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카라라(Carara) 지역 대리석을 선호했습니다. 카라라 대리석은 결점이 없는 백색의 아름다움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나는 대리석 속에 갇힌 천사를 보았고 그가 차가운 돌 속에서 풀려날 때까지 돌을 깎았다.”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이란 돌 속에 갇힌 인물들을 해방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완벽한 돌을 찾아 헤맸으며 수십 번 채석장을 찾았고, 수 개월을 채석장에서 살다시피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사이즈와 모양을 찾기 위해 애쓰고, 돌을 캐내고, 운반하는 과정에 모두 관여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에 거주할 때 르네상스의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었는데 1504년 피렌체 정부는 이 두 천재로 하여금 팔라초 베키오의 대회의실의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의 전투>의 구상에 착수했고, 8월에 미켈란젤로는 <카시나의 전투>를 맡았지만 두 사람 다 중도에 포기하는 바람에 두 거장의 작품이 한 공간에 전시될 기회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카시나의 전투>를 위해 많은 드로잉을 했습니다.

전투 하루 전 전사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역동적으로 뒤섞인 인간 무리를 묘사한 인체 습작은 후대 예술가들의 인체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 <카시나의 전투> 모사, -상갈로

 

16세기 화가들은 드로잉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화가들은 손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머리를 쓰는 사람들보다 조금 낮게 취급되었습니다. 화가들은 그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회화 예술이 손으로만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창조하는 과정임을 역설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드로잉은 디세뇨(Disegno)인데 드로잉을 의미할 뿐 아니라 형태를 창작하는 행위를 지칭했습니다. 미켈란젤로 역시 생전에 600여 점 이상의 드로잉 작품을 남겼는데 그리스도의 처형 시리즈나, 수태고지, 피에타 등 그의 다양한 드로잉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깊은 고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504-1506 <도니 론도> (29-30세)

 

1508―1512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일명 <천지창조>로 불리는 이 작품은 천장 중앙 부분을 9개로 나뉘어 제단 쪽에서부터 천지창조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 작품이 진행 중일 때 교황은 언제 작업이 끝나느냐고 물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완성되는 날에 끝난다”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멋진 말 아닙니까. 모든 것은 끝나는 순간 이전에는 끝나지 않으니까요.

 

 

1513-1516 : <반항하는 노예>, <죽어가는 노예>, <모세> (38-41세)

 

 

너는 신을 잊었지만 신은 너를 잊지 않았다 - 모세

 

1517 마틴 루터 종교개혁

르네상스는 고대 인문학의 부활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열린 '신과 개인적인 만남'으로 인한 신앙의 갱신을 가져왔고, 이는 미켈란젤로의 신앙과 예술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527 카를 4세 휘하 독일, 스페인 군대 로마 약탈

 

1534 메디치 무덤 완성 (59세)

 

 

1536-1541 <최후의 심판> (61-64세)

 

 

시스티나 예배당 제단화로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주문하여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해 인류를 심판하고, 구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대작입니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로 생각했기 때문에 회화 작품을 의뢰받는 것을 꺼려했다고 합니다. 1509년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레스코화의 문제는 회화가 제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프레스코는 작업 과정이 까로워웠던 만큼 기술적인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레스코는 이탈리아어로 ‘신선한’이라는 뜻으로 벽이 축축하고 말 그대로 신선할 때 물에 녹인 안료로 그리는 기법을 말합니다.

 

프레스코를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벽에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소묘를 그린 다음 안료를 발라야 합니다. 벽이 마르기 전에 그려야 하는 만큼 숙련된 기술이 요구되는 기법이었으나 미켈란젤로는 곧 익숙해져서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같은 대작을 남겼습니다.

 

 

1540 <그리스도의 처형>

 

 

1547 성 베드로 성당 수석 건축가로 임명 (72세)

 

1550 피올리나 예배당 프레스코 <사울의 개종> <성 베드로의 순교> (75세)

 

1552 <론다니니 피에타>(미완성) (77세)

 

1555 <피렌체 피에타> (80세)

 

 

특별전에는 미켈란젤로의 회화가 디지털로 복원되어 다양한 형태로 전시되어 있는데 관람객이 손을 가까이 대면 디지털 작품으로 변한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 방향을 돌리며 움직입니다.

 

 

<피렌체의 피에타 상>은 <십자가에서 내림>이라고도 불리는데 대개의 피에타상이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를 그리고 있는 반면 이 작품은 니고데모와 마리아와 막다라 마리아가 예수의 몸을 부축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무덤에 놓아둘 생각으로 만든 것으로 니고데모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1564. 2. 18. 사망 (89세)

 

 

주여, 제가 이룬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하소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예술가가 얼마나 더 있을까요?

평생 동안 수많은 예술 작품을 만들어냈는데 더 갈망하는 것이 있다니!

 

예술이 존재하는 한,

예술은 세월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을 위해 나는 예술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미켈란젤로, 1564

 

“나는 신이 주시는 특별한 빛 속에서 살고 사랑한다.” 라고 미켈란젤로는 말했습니다.

 

그는 정말 신의 은총을 온몸으로 받아서 그것을 다시 예술로 승화시키며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의 피에타를 보면서 고난에 찬 인생을 위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니까 말입니다.

 

 

미켈란젤로는 그림과 조각뿐만 아니라 詩와 서간문을 통하여 자신의 삶과 예술에 대해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1486년부터 1563년까지 500여 편의 편지와 시를 통해 자신의 예술관과 삶의 여정을 드러냈습니다. 1546년 이후 시집 출판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의 만년의 시들은 종교적인 경건함과 성스러운 믿음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비참한 작업 때문에

나는 마치 롬바르디아의 고양이들이 어디서 물을 마시고 걸린 듯한 종기를 얻었네.

종기가 내 배를 채우고 턱까지 밀려왔지.

수염은 하늘로 뻗쳤고. 내 기억의 자리는 혹처럼 부풀었네.

나는 하프처럼 뚱뚱해졌고 붓에서 튀기는 물감은 내 얼굴을 모자이크로 만들었지.

내 허리는 창자 속으로 파고들었네.

균형을 잡기 위해 나는 말처럼 궁둥이를 뒤로 빼고 보지 않고

몸을 움직이기 위해 내 다리는 정처 없이 흔들리네.

팽팽하게 뻗은 내 피부는 시리아 활처럼 뒤로 잔뜩 움츠러든다네.

나는 구부러진 총처럼 표적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며 마음에 없는 판단을 내린다네.

조반니, 내 대의를 알아주게.

내 죽은 그림과 내 명성을 지켜주게.

비참해진 나는 이제 화가도 아니라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작업 당시 미켈란젤로가 그의 친구 조반니 다 피스토이아에게 보낸 편지

 

 

미켈란젤로는 죽음을 앞둔 시기에 소네트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기나긴 인생의 여정은 폭풍 치는 바다를 지나

금방 부서질 것 같은 배에 의지해,

지난날의 모든 행적을 기록한 장부를 건네야 하는,

모든 사람이 거쳐 가는 항구에 도달했다네.

예술을 우상으로 섬기고 나의 왕으로 모신,

저 모호하고 거대하며, 열렬했던 환상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네.

나를 유혹하고 괴롭혔던 욕망도 헛것이었네.

옛날에는 그토록 달콤했던 사랑의 꿈들,

지금은 어떻게 변했나. 두 개의 죽음이 내게 다가오네.

하나의 죽음은 확실하고, 또 다른 죽음이 나를 놀라게 하네

어떤 그림이나 조각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네.

이제 나의 영혼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껴안기 위해

팔을 벌린 성스러운 사랑을 향해 간다네.

―최영미 역

 

미켈란젤로는 예술을 우상으로 섬기고 나의 왕으로 모신, 저 모호하고 거대하며, 열렬했던 환상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네 하고 노래합니다.

 

자신이 이룩한 위대한 예술적 업적을 뒤로 하고 한 인간으로서 신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영혼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껴안기 위해 팔을 벌린 성스러운 사랑을 향해 간다네.

 

그러나 신의 심판은 오히려 성스러운 사랑으로 변합니다.

 

 

1564년 2월 18일, 르네상스의 거장은 신의 따뜻한 사랑의 품속에서 평온하게 잠듭니다.

 

미켈란젤로는 "영혼은 신에게, 육체는 대지로 보내고, 그리운 피렌체로 죽어서나마 돌아가고 싶다" 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천재란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고 말했던 노벨상 수상자 로맹 롤랑은 미켈란젤로의 전기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2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 5시경이었다. 날이 저물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과 평화의 왕국의 첫날이…. 이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혼은 얼마나 행복한가."

 

 

미켈란젤로 특별전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리며 그의 작품을 디지털 기술로 복원했다는 점에서 나름 특별한 전시회였습니다.

 

전시장을 나오면 아트숍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만든 다양한 상품들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 두 점 샀습니다.

 

 

르네상스의 또 다른 거장 라파엘로는 “내 그림 실력으로는 미켈란젤로를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르네상스 시기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의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예술 천재로서, 화가와 조각가이자 시인으로서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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