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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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32)

by 브린니 2020. 9. 23.

진짜 교회 32

 

 

 

죄와 벌 대신 그리스도의 정의로운 인격을 보라!

죄와 용서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라!

 

 

김이레 목사와 젊은 목사들이 함께 모였다. 수 차례 메일 교환을 통해 총회에 속한 젊은 목회자들은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고, 개혁을 위해 모이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첫 번째 개혁을 위한 젊은 목회자들의 모임이 박정현 목사가 섬기는 OO교회에서 열렸다.

 

“목회자들이 회개해야 한다면 가장 중심 되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박정현 목사가 입을 열었다.

 

“교회 재정을 유용한 것이나 성범죄 같은 것이지요.”

길동우 목사가 대답했다.

 

“그런 건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는 일 아닙니까. 일부 몰상식한 목사들이나 하는 짓이지.”

하민석 목사가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느 교회나 목사가 1인 체제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그래서 성도들과 연합이 잘 안 됩니다. 서로 목회자 눈치나 보면서 편가르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영찬 목사가 말했다.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가 목회자라고 너무 군림하고 있어요. 성도들의 건설적인 비판도 듣기 싫어합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목회자가 다 결정하면서 성도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순종과 헌신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동민 목사가 덧붙였다.

 

“지목사나, 고목사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나는 뭐, 우리 목회자가 그렇게 심하게 굴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길동우 목사가 말했다.

 

“우리가 교회에서 왕 노릇을 한 지는 정말 오래됐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작아도 목회자는 그 교회에서는 최고 높은 자로서 자기 뜻대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목사가 말했다.

 

“반대로 사실 우리가 얼마나 교인들 눈치를 봅니까? 우리가 교회를 맘대로 운영하는 게 아니라 눈치 보다 끝나는 것 같은데요.”

하목사가 말했다.

 

“목회 전문가와 일반 성도, 그러니까 목회자와 평신도, 두 그룹으로 교회가 나뉘어 있는 것이 그 원인이지요. 이미 우리의 의식 속에서 목회자와 교인은 하나가 될 수 없는 부류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도 위에 군림하지 않으면 반대로 성도들 눈치를 보면서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박정현 목사가 말했다.

 

“목사님들께서 정확하게 진단하셨습니다. 교회 내에서 목회자와 성도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는 한 교회는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와 가르침은 있을지 모르지만 교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제가 없다면 설교와 가르침이 온전한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가르치고 권능을 주어 그들에게 복음사역에 동참하게 했습니다. 제자들의 사역에도 기적이 일어났고, 많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만을 위해 제자를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가까이에서 동행하며 교제하기를 원하신 것이지요.

 

요즘 우리 교회들의 타락을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외치는 영적으로 성숙한 목사님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섬기는 교회에 하나님과의 교제 못지않게 성도들의 교제가 있는지 묻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와 성도들이 허물없이 교제하고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여기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교회는 직분이 계급화 되었다는 것을 탄식하며 모든 성도들을 직분으로 부르지 않고, 다 같은 성도라고 부르거나 형제, 자매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로, 권사, 집사 할 것 없이 모두 형제요, 자매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목회자는 빠져 있습니다. 목회자는 늘 목사입니다. 어디에서나 말입니다.

 

가끔 그분들이 목회자 세미나를 열면 조원으로 참여하는 목회자들에게는 목사 계급장을 떼고,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장이나 강사로 참여하는 분들은 여전히 조장님이나 강사님 혹은 목사님이라고 부르게 합니다. 기왕에 형제, 자매라고 할 바엔 목회자도 형제나 자매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가 아직도 유교적이어서 호칭 하나조차 바꾸지 못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를 굳이 형제, 자매라고 부르라고 강조하는 것 자체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교인이나 평신도로 분리하니까 장로 역시 자신과 다른 성도들을 분리하고, 권사도 그렇게 하고, 집사도 자기 아랫사람들과 자신을 분리합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교회에는 분리의 영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분리의 영이란 다름 아닌 교만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 다른 부류와 분리함으로써 스스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만은 너무나 뿌리 깊이 박혀 버려서 우리의 정체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스스로는 결코 알아볼 수 없는 것이지요. 이 교만이 에덴에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장본인입니다.

 

우리가 교만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그리스도의 교회를 내 교회로 만들고,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이 겉으로 드러나면 권력이 됩니다.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성도와의 교제는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 사이에 역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지금까지가 성령의 시대라고 입을 모으지만 정작 성령은 우리 교회 가운데 종적을 감추신 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김이레 목사가 탄식하듯 말했다.

 

“목사님 말씀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하민석 목사가 말했다.

 

“저도 그러네요.”

길동우 목사도 동의했다.

 

“총회에서 회개도 하고, 목회자 세미나에서 실컷 이야기 들었지만 그저 그러려니 했습니다. 사실 저는 목회자가 설교 잘 하고, 심방하고, 자기 할 일 잘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카리스마를 가지고, 리더로서 교인들을 이끌고 그러는 게 본분인 줄 알았으니까요.”

하민석 목사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느헤미야 형제가 선의로 시작한 일이 결과적으로 악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목사님들 모두 나름대로 주를 위해 열심히 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편지라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편지 글귀에 탄복하는 바람에 주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과부의 렙돈 두 닢이나 마리아의 향유는 헌금을 강조할 때 적용하는 성경구절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부로 여기며 왕과 주로서 섬길 때 가져야 할 온전한 태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에 열중하는 바람에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돕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킨 부자 청년이나 우리나 모두 어떤 영적인 것을 통해 영생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하는데는 게을렀습니다.

 

율법 조항들을 잘 지키는 것보다 그 율법의 정신, 즉 서로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었습니다. 안식일에 제사 드리는 것 못지않게 강도 만난 자를 돌보거나 병자를 고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들을 분리하고 군림하면서 가르치려고만 한다면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법을 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설교하고 가르치더라도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성도들을 가르칠 대상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고 돌보지 않으면서 이웃을 섬기겠다고, 고아원, 양로원, 노숙자 센터 등을 들락거린다고 해서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구제한다고 기껏해야 교회 재정의 몇 퍼센트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증거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는 중산층뿐입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낼 만한 경제 수준이 되어야 교회에 나올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다 보니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육신으로 오신 메시아를 죽이는 꼴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의 부흥을 내려달라고 간구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습습니까?”

김이레 목사가 피를 토하듯 말했다.

 

“자, 그럼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우리 목회자와 교회 모두 온전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고 논의해봅시다.”

박정현 목사가 제의했다.

 

“교회 세습은 어떤 형태로도 결코 불가능하게 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교회 재정을 완전히 투명하게 해야 합니다. 세금 낼 것도 내고, 모든 재정을 성도들에게 공개해야 합니다. 세상에도 공개하고요. 요즘 회계사 비용 쌉니다. 회계사무소에 맡겨서 흠이 없게 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의 사생활도 관리해야 합니다.”

 

목사들이 저마다 하나씩 문제들을 이야기했다.

 

“대형교회 성도들이 흩어져서 지역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어느 정도 현실화 되고 있습니까?”

성영빈 목사가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느헤미야 형제가 섬기는 OO교회는 진척이 많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와 고영찬 목사님 교회가 지금 막 시작하고 있고, 박정현 목사님 교회도 논의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이레 목사가 대답했다.

 

“대형교회가 흩어져 여러 작은 교회가 된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도충곤 목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주께서 주의 교회에 행하시는 일입니다. 앞으로 더 놀라운 일들이 많이 벌어질 것입니다.”

김이레 목사가 말했다.

 

“목사님은 어떤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길동우 목사가 물었다.

 

“앞으로 주께서 하실 일이 더욱 더 기대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저는 이렇게 우리가 모여서 주의 교회를 향해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이지 가슴 벅찹니다.”

김이레 목사가 말했다.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 지가 언젠지…… 아마 신학교 때 말고는 없을 걸요.”

하민석 목사가 말했다.

 

목회자들 저마다 개혁안에 대해 다시 한번 한 마디씩 했다. 서기를 맡은 이환준 목사는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제 대충 정리가 된 듯 합니다. 이 안건들을 가지고, 돌아가셔서 더 좋은 방안들을 찾아보시고, 보름 뒤쯤 다시 만납시다.”

박정현 목사가 말했다.

 

김이레 목사와 고영찬, 박정현 목사는 따로 남아서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마음을 모았다.

 

“우리는 여전히 누가 큰가를 경쟁하고 있습니다.”

김이레 목사가 교회 개혁이 결국 목사들의 몫이며 목사들이야 말로 개혁의 대상임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맞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누가 큰가를 경쟁하는 순간 교제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서로 하나가 되어 풍성하게 교제한다면 우리 교회에는 더 이상 죄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 사이가 투명하게 서로에 비친다면 그 사이에 죄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설령 형제가 죄를 지었다고 해도 서로 죄를 고백하며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덮는다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짐을 져준다면 죄의 짐도 대신 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애통하며 함께 중보 기도한다면 결코 교회가 타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자신이 더 낫다고 여기고, 위선을 떨면서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에 은밀한 죄는 더 깊이 숨게 되고, 마귀는 더 깊은 죄악의 수렁으로 우리들을 몰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더 교회가 회칠한 무덤처럼 더러운 죄로 썩고 냄새가 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또 회칠을 하고, 더 가리고 숨기고, 덮으니까 지금 이 꼴이 된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없는 교회, 사람이 온전한 사람으로서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교회에 그리스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들은 현재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무시하고 경멸하면서 교회 밖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교회인데 그 몸의 지체인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정죄하면서 교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앉으면 목사를 욕하고, 다른 성도를 비난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이 교회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설교 때마다 비판하고, 심방 갈 때마다 권면하고 가르치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러나 정작 목사들의 삶을 돌아봅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경건을 얼마만큼 따라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우리가 사역자로서 경건의 훈련을 하면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기도하자고 외치고 있지만 목회자들의 평균 기도시간이 하루 십 분도 채 안 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욕하고, 들보는 못 보고 티끌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들조차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현 목사가 말했다.

 

“목회자 윤리 강령을 다시 시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영찬 목사가 말했다.

 

“사실 노회나 총회에 윤리위원회가 있지만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윤리가 세상의 윤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박정현 목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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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와 총회가 모일 때 목회자들의 윤리 문제를 주제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개교회 중심주의에 물든 개교회가 자신들의 문제를 꺼내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노회나 총회의 징계 조치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요.”

 

“노회나 총회도 자체적으로 문제가 많기 때문에 조치에 권위가 실리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는 밑으로부터의 개혁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김영수 목사님이나 총회장 등 뜻있는 원로들이 나서서 위에서부더 바꾸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왜 낮은 윤리의식을 갖고 있는지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리나 신학에서부터 오류가 있습니다.”

 

“네? 교리나 신학이 문제라니요?”

 

“교리나 신학 자체라기보다는 일종의 적용이나 실천면에서죠. 예를 들어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다' 라는 것에서부터 주일학교에서 배우는 찬양 가운데 '돈으로도 못가요, 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이런 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마치 윤리 따위는 상관없이 오직 믿음, 즉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입술의 고백만으로 천국에 갈 것처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 아닌가요?”

 

“루터가 믿음을 강조한 것은 중세 가톨릭이 믿음 외에 다른 우상적인 것들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처럼 선전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증거가 따라야 합니다.”

 

“믿는 대로 살아야 진짜 믿음이겠죠.”

 

“네, 우리는 믿기는 믿지만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짓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것을 다 용서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이 용서하신다는 식의 자기 합리화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으면 벌 받는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도 너무 율법적이지 않나요?”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나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억압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이것도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죄를 지으면 벌 받는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우신가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를 닮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정의롭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알려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작은 예수로 길러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군요. ‘죄를 지으면 벌받는다’도 아니고,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예수님이 용서하신다’도 아니라 정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굳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인격, 아니, 죄를 지을 수 없는 인격으로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로지 사랑으로 길러야 합니다. 오직 사랑이 모든 것을 완성합니다.”

 

“그렇군요. 정말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은 모든 일에 너그럽습니다. 욕심이 별로 없고요.”

 

“죄는 결핍에서 나오기 쉽습니다. 그래서 더 갖고자 하니까 선을 넘게 되고 죄를 짓습니다. 도둑질이나 간음 모두 그렇습니다. 권력욕이나 명예욕 역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은 결핍이 덜하기 때문에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아이들부터 걱정입니다. 제가 목회한다고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목회가 실패한 지점이 바로 여깁니다. 우리는 설교 시간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치지지만 정작 우리 가정도 사랑으로 보살피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을 사랑으로 끌어안지도 못했고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먼저 가르치고, 실천하고, 널리 베풀었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가 세상의 놀림거리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요. 교회에 사랑이 없으니까요. 오로지 욕심에, 굶주린 듯이, 교회의 덩치만 키웠습니다. 우리 교회 100년 사에 사랑이 없습니다. 텅 비어 있습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는 것이 가장 문제이군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목회자의 일상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일상을 바꾸어야 합니까?”

 

“목회자나 성도나 다 쉬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새벽기도부터 쉬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더 열심히 모여 기도해야 하지 않나요? 이런 어려운 시대에.”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정말 목사님은 주님이 우리가 쉬는 걸 원하신다고 믿습니까?”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쉬는 것부터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쉼이 없이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지옥문 앞에 와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는데 지옥문 앞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열심히 달려온 건 맞는데 정말 우리가 지옥문 앞에 와 있다는 말씀입니까?”

 

“여기가 지옥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된 목적지에 도착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 속에 사랑이 넘쳐야 하는데 현재 우리 목사들이 목회 하느라 너무 바쁩니다. 사랑할 시간도 여유도 없습니다. 일단 먼저 쉬면서 우리 속에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축구 선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도 쉼이라고 합니다. 경기에서 많이 뛰고 훈련도 쉬지 않고 많이 한다면 그 선수는 은퇴가 빨라질 것입니다. 목사들도 충분히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도 쉴 수 있습니다. 말로만 그리스도가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할게 아니라 진짜 쉬어야 합니다."

 

"교회에 예배나 행사나 모임 등이 너무 많기는 하죠." 

 

"네, 이제 교회는 뭔가 달성해야 하는 목표를 버려야 합니다. 평화와 안식과 쉼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 형제는 교회의 모든 것을 이웃사랑에 포커스를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부터 교회는 이웃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일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들이 성전 건축에 열을 올리지 않는다면 정말이지 이웃들을 섬기는 일에 많은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루터 역시 95개조 반박문에서 성베드로 성전이 불이 탈지언정 더 이상 우리 양떼들의 피와 살과 뼈로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 역시 막대한 은행 빚으로 성전을 건축하는 바람에 성도들이 분에 넘치는 건축헌금을 내고 있지만, 원금을 갚기는커녕 이자 감당하기도 어려운 실정에 봉착해 있습니다. 그 물질로 가난한 자를 돕고 이웃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을 나누는 일에 교회의 목표를 둔다면 우리 교회는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은 십일조나 헌금을 교회 건축이나 조직 운영을 위해 바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를 구제할 때 그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는 누가복음 말씀을 잊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다 목회에 성공하려는 욕심에서입니다. 이게 다 성전을 크게 건축하고, 성도들을 많이 끌어 모으는 것이 성공한 목회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목사들은 자신들의 문제들을 직시했고,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현재의 문제는 진짜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기를 회피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자신의 문제는 보지 않고, 다른 곳에서 해결점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속과 겉을 다 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 속에 있는 탐욕과 악독으로 차라리 이웃을 구제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속에 숨은 목회 성공이라는 탐욕과 자신의 목회 성공을 위해 성도들의 피를 빨아서 성전을 크게 짓고, 자랑하고, 군림하려는 악독을 버린다면 우리 교회는 이웃과 화목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썩어지는 밀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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