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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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26)

by 브린니 2020. 9. 6.

진짜 교회 26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예루살렘을 위해 울라!

 

 

김이레 목사는 집으로 돌아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했다. 그동안 자신의 목회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 왔으나 과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고 양떼를 먹였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느헤미야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는 자기 삶이 성경 말씀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신앙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 자신의 삶과 행동방식에는 문제가 있었다. 특별한 죄를 짓거나 규례를 어긴 적은 없지만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 목회자로서 교회 성장과 운영에는 탁월했지만 성도들의 마음을 살피고, 그들을 제자삼고, 그들에게 복음의 사명을 일깨워 세상으로 내보내지 못했다. 자기 자신도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나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충실하지 못했다. 또한 교회에 들어와 있는 세상 가치관과 은밀한 죄에 대해 무책임하게 회피했다. 그는 교회가 크게 성장하자 거기에 머물렀다. 베드로처럼 여기가 좋으니 초막을 짓고 머물고자 했다.

 

목회자인 내 말만 잘 듣고 따라오면 신앙생활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식으로 성도들을 몰고 갔다. 내가 목회를 하고 있는 우리 교회가 최고라는 식으로 이끌었다. 교회중심주의, 목회자중심주의, 그리고 결국 ‘나’ 중심주의였다.

 

과연 우리 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할까.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우리 교회 성도들 대부분이 죄에 쪄들어 있다면 어떡할 것인가. 나 역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한 제사장인가.

 

김이레 목사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영적으로 존경받는 어느 목사님조차 죄를 멀리 하라고 그렇게 설교했는데도 어느 날 점검해보니 많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죄에 깊이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교회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 그런데도 교회 운영이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있으니 다 됐다, 하는 마음으로 안일해져 있었던 것이다.

 

김이레 목사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제 삶을 조정하겠습니다.”

“아들, 정말 올바른 결단을 했구나.”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

“그래,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러나 네가 터를 닦으면 다른 사람이 세운다는 말씀을 잊지 마라. 네가 다 하려고 들지 마라.”

 

“알겠습니다. 주께서 필요한 곳에 꼭 맞는 분을 쓰시겠지요.”

“그래, 떠나는 것은 빠를수록 좋다.”

 

3년 뒤에는 안식년이므로 그때쯤 사직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곧 결정을 내리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막막했다. 어디서부터 정리를 시작하고, 무엇을 정리하고 어디로 갈 것인가. 주님이 정녕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김이레 목사는 다음날 아침 하대성 장로댁을 방문했다. 그분은 장로직에서 은퇴한 뒤 조용히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아버지를 도와 교회를 개척했으며, 최근까지 김이레 목사를 아들처럼 여기며 늘 격려해왔다.

 

“아이고, 목사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하장로가 현관까지 나와 김목사를 맞았다.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하나님 일 하시는데 더 바쁘셔야죠.”

 

“장로님, 이제 쓸데없이 안 바쁘려고 합니다.”

“하하. 좀 쉬시는 것도 좋지요. 그래 안식년은 좀 더 남았죠?”

 

“네, 두어 해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벌써 쉬시고 싶으시다?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장로님, 그동안 정말 주님을 위해 헌신해오셨는데 혹시 후회되시는 일 없으십니까?”

“글쎄요. 생각해보면 많이 있겠지요. 그런데 잘 생각 안 하려고 합니다. 목사님 아버님 도와서 개척할 때만큼 좋았던 적은 별로 없지요. 그 뒤로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저는 매우 평탄했습니다. 뭐, 작게는 후회할 만한 것도 있지만.”

 

“혹시 저를 후임 목사로 데려오시고 난 뒤에 후회는 없으셨습니까?”

“세습이니 뭐니 하는 말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직도 누가 그런답니까?”

 

“아닙니다. 그런 말들이 무서워가 아닙니다. 장로님 신앙 양심상 그 일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김영수 목사님이 떠나신 지도 꽤 오래 되었고, 목사님 오시고 나서 교회가 안정 되고, 크게 부흥하지 않았습니까. 후회할 이유가 없지요.”

 

“교회가 성장하고 안정되면 다 좋은 겁니까?”

“네?”

 

“장로님, 우리 교회가 교회로서 주의 사명을 다 하고 있는 것일까요?”

“무슨 말씀이세요? 뭐, 우리만큼 하면 꽤 열심히 하고 있다고 봅니다. 요즘 같이 교회가 제구실 못하는데 우리는…….”

 

“그렇지요.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잘 하고 있다고 믿는 근거가 무엇인지, 또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실지 궁금하다는 말씀입니다.”

 

“목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

“장로님, 아무런 문제없이 지금도 교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문제가 아닐까요?”

 

“아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한국 교회가 급속도로 내리막을 걷고 있습니다.”

 

“네,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네? 그게 왜……? 목사님, 우리 교회는 목사님 말씀이 너무 좋으니까…….”

“과연 목사 설교가 뭐 그렇게 중요하길래 한국 교회 전체가 내리막인데 우리 교회만 성장한단 말입니까?”

 

“우리 교회가 사랑을 실천하니까 그렇죠. 얼마나 많이 구제하고 봉사합니까.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성도들을 따라 교회에 나오는 믿지 않는 자들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처럼요. 목사님이 그 일에 앞장서고 계시지 않습니까.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에 우리 교회처럼 이웃 사랑을 실천해보십시오. 교회는 곧 부흥할 것입니다.”

“네, 장로님 말씀 정말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처럼 부흥하는 교회가 몇 교회나 될까요?”

 

“별로 안 될 겁니다. 노회나 총회 보고서에도 플러스 성장을 하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교회 전체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지 벌써 오래지요.”

“그러니까 장로님. 성장하는 몇몇 교회만 남고, 나머지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될 시기가 언제쯤일까요?”

 

“아, 정말 심각합니다. 전문가들은 2020년부터 2030년 사이에 정말 큰 위가 올 거라고 합니다. 교회는 노인들만 남아 있고, 젊은이는 하나도 없게 된다고 합니다 .”

“사실 요즘도 그렇지 않나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도 젊은이들이 보다 많아져야지요. 평균보다야 많지만.”

“장로님, 만약 몇몇 교회만 남고, 다른 모든 교회가 문을 닫는다면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더 성장할까요? 아니면 우리도 언젠가 문을 닫게 될까요?”

 

“음…… 유럽이나 영국 교회를 예로 볼 때 아마도 우리 교회 역시 마이너스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겠네요.”

“자, 보십시오.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으면 우리 교회도 급속도로 쇠락할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교회에 대해 무관심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줄어듭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관심이 많아지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교회에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지금 사람들이 교회라면 치를 떨고, 아예 교회라는 말조차 듣기 싫어합니다.”

 

“참, 그러게 말입니다. 휴.”

“장로님, 제 말을 잘 들어주세요. 교회는 결코 교회만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죽어 가면 세상도 죽어갑니다. 우리가 빛을 발하지 못하면 세상이 어둡습니다. 세상의 어둠이 너무 짙으면 교회까지 어둠에 덮이고 맙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네. 알기는 알겠지만.”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성장하고 부흥한다고 좋아할 일이 전혀 아니란 말씀입니다.”

 

“네? 저는 전도위원들에게 교회가 다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데 우리 교회만 플러스 성장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은혜가 넘치냐, 이를 선전하고 전도하라고 가르치는데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도 그동안 그것이 자랑거리였습니다. 저도 제가 목회 잘 해서 그렇게 된 줄로 알았습니다.”

 

“그렇지요. 목사님이야 목회에 성공하셨죠. 곧 아버님 이상 성공하실 겁니다.”

“장로님 제가 목회에 성공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우리 교회가 몇 십만 명으로 불어난다고 해서 정말 성공한 것일까요? 다른 교회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 교회만 독야청청한다고 기뻐해야 합니까? 정말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겠습니까?”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잘…….”

“장로님, 며칠 전 아버지가 찾아오셔서 안식년 다녀와서 당신 교회로 복귀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그분이 왜요? 누가 반대합니까?

“그게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제 후임에게 물려주시고 당신은 목회자 구하기 힘든 섬 같은 데서 마지막 목회를 하시겠답니다.”

 

“정말 귀하십니다. 성자 같습니다.”

“장로님, 아버지가 왜 그런 결정을 하신지 아십니까?”

 

“그분이 원래 경건하신 분 아닙니까. 이번에 총회에서도 교계 전체를 대표해서 회개 운동을 벌이시지 않았습니까. 정말 요즘 같은 세상에 그분 만한 분이 어디 있습니까?”

“네, 그렇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하신 것은 그동안 내 교회만 성장시키면 된다고 믿고 달려왔는데 결과는 내가 아무리 잘 되도 한국 교회 전체가 망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무리 어려운 시기라고 해도 목사님 부자께서 이렇게 목회를 잘 하고 계신데 무슨 걱정입니까. 아버님 목사님이야 이루실 것 다 이루셨으니 여생을 조용히 지내시겠다고 결정하실 수 있지요. 또 은퇴한 뒤에 원로로 남아서 교회에 피해를 주는 것보다 몇 년 일찍 퇴임하시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시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버지 개인적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아버지나 저나 지금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 역시 무너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라 없는 국민 없듯이 한국 교회 전체가 죽어가는 데 우리 교회가 좀 사정이 낫다고 안일하게 앉아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목사님.”

“장로님도 한국 교회 상황을 잘 아실 것입니다.”

 

“솔직히 얼굴 들고 나갈 수도 없지요.”

“그런데 이를 해결할 능력이 교회에 있습니까?”

 

“우리가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셔야지요.”

“하나님이 뭘 하십니까?”

 

“네?”

“하나님이 이 판국에 무엇을 하실 수 있냐고요?”

 

“네? 아니, 목사님!”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 말고 무엇을 더 하시겠느냐고요.”

 

“아, 네…… 그렇겠……네……요.”

“우리는 다시 한 번 부흥을 달라고 외치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요?”

 

“하나님은 도리어 심판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복을 달라고 손을 벌리고 애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회개는 하지 않고 부흥을 달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회개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글쎄요. 그런 것도 같습니다. 사실 그냥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했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로님, 최소한 한 가지만은 회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목사를 전하고, 교회를 전해왔습니다.”

 

“네, 솔직히 그랬죠. 그래야 교회가 발전하니까요.”

“그동안 우리 주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교회는 크게 성장했지만 그 큰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제가 너무 심하게 말했습니까?”

 

“이론적으로는 맞습니다만. 정말 우리 교회에 그리스도가 안 계신단 말입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장로님께 여쭤보려고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오, 주여. 목사님, 제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시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저도 아버님 목사님과 목사님 섬기고 교회에 헌신해왔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에 헌신한 것입니까? 제가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게 아니라 목사님 두 분을 모셔왔단 말입니까?”

“장로님, 정말 죄송하지만 아마도 그게 진실 아닐까요?”

 

“오, 목사님. 그게 진실이라면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로님,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늘 기도하지요. 앞으로 더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합니까.”

“제가 먼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제가 목사 아닙니까. 아버지와 제가 장로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종을 목사들한테 충성하도록 만든 것 아닙니까. 저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김이레 목사는 하장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니, 아니, 목사님 왜 이러십니까. 목사님 잘못 모신 제 죄가 큽니다.”

 

하장로도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 안았다. 김이레 목사는 하장로 품에 잠깐 동안 안겨 있었다.

 

“목사님,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겁니까? 우리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입니까? 정말 주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달려왔는데 푯대가 왜 엉뚱한 곳에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께 헌신한 게 아니라면 무엇 하러 미친 듯이 달려왔을까요?”

 

“죄송합니다. 저희 목회자들이 오로지 목회 성공하는 데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성장시키면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목회도 성공하고, 교회도 성장했습니다.

 

그럼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고, 내 인생을 전부 그리스도께 드리겠다고 결단하던 그날로 돌아갔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의 종인지 목회 성공이나 교회 성장이라는 욕망의 종인지 살폈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회 성공에 취해서, 교회 성장에 눈이 멀어서 그리스도를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내 목회, 내 교회, 내 교인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그리스도의 자리는 아무 데도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목사와 목사에 충성하는 교인들뿐입니다.

 

교회가 없어진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자기 야망에 미친 목사와 그 권력에 빌붙어 복을 구걸하는 간신배들의 무리로 변한 것입니다. 장로님, 저희 목회자들이 주의 부르심을 받아 교회로 모인 성도들을 다 죽인 것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목회자들에게 맡기신 양떼들을 다 몰살시킨 것입니다.”

 

“목사님, 그렇게까지 생각해야 합니까? 제가 보기로는 목사님 두 분은 정말 그리스도께 헌신하신 분들입니다.”

 

“저도 아버지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용서하시고 양들을 맡기셨지만 그가 배신한 것은 사실입니다.

 

저와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했습니다.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저와 아버지 모두 그리스도를 배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내 교회로 여기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를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로 계속해서 십년 넘게 그리스도를 버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닭이 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닭이 수없이 울었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삯군 목사들을 향해서 우는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죄는 모르고, 우리는 괜찮다고 여긴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모두 타락했는데 어떻게 저와 아버지만 괜찮을 수 있습니까? 한국 교회가 다 무너져가고 있는데 어떻게 아버지와 제 교회만 괜찮을 수 있단 말입니까?

 

복숭아 한 상자가 다 썩었는데 내 복숭아 한 알이 아직 덜 썩었다고 마음 편히 있겠습니까? 내 복숭아가 그 상자에 들어 있다면 썩는 것은 한 순간일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다 썩었다면 우리 교회가 조금 덜 썩었다고 발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곧 심각하게 썩어서 냄새가 진동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교회는 안전하다고, 잘 나간다고 자랑하고 있으니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스럽겠습니까?”

 

“오, 주여. 어찌합니까. 목사님, 이제 어떡합니까.”

 

김목사와 하장로는 또 다시 부등켜 안고 울었다. 다 큰 어른 두 사람이 서로 부둥켜 우는 모습을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통곡하였다. 자신의 죄 때문에, 우리 교회의 죄 때문에.

 

잠시 후 울음이 잦아지자 김이레 목사가 하장로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장로님, 사실 이러한 죄는 이미 잘 알려진 것입니다. 세상은 다 아는데 우리만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온 교회와 성도들, 심지어 세상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고 울고 있을 게 아닙니다. 회개를 했으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목사님, 뭘 어쩌시게요?”

 

“장로님, 저는 교회를 떠나 새로 개척을 시작하든지, 해외로 선교를 나가든지, 목회자가 없는 작은 교회로 가겠습니다.”

“아니, 목사님,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장로님, 우리 목회자들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한 성도들과 세상은 우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쇼라고 여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굳이 이런 식으로 가시적인 결과를 보여줘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조용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모두 침몰하는 배를 타고 가라앉고 있습니다. 조타실에는 아직 물이 차지 않았으니 다른 배가 와서 우리를 구원해줄 때까지 기다리자 하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주님이 있지 않습니까? 주의 긍휼을 기다리며 근신하고 있으면…… 주께서…….”

 

“네, 우릴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심판하실 것입니다. 완전히 심판하신 후에 싸매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뒤에 바벨론의 통치 속에서도 유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심지어 바벨론의 제2, 제3의 통치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완전히 멸망했고, 그 후 다시는 나라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그 지경이 되었습니까?”

 

“멸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도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아서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숨어 있는 모든 우상을 파괴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에게는 목회 성공과 교회 성장이 우상입니다. 성도들은 물질에 대한 탐욕, 성적인 쾌락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들을 완전히 끊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아, 그것들이 모두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까?”

“일부러 드러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떠나시는 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부터 시작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주님께 드리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 성공과 교회 성장이라는 우상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으로 가겠습니다. 그것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목자가 양을 버리고 떠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장로님, 저는 목자가 아닙니다.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성도들을 먹이고 기르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풍성하게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다만 주의 종으로서 주님이 가라는 데로 가서 주께서 맡기시는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럼 다른 목사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까?”

“누구를 특별히 모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주께서 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립시다.”

 

“네, 목사님.”

“장로님,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을 당장 이번 주부터 실천해나갈 것입니다. 장로님이 도와주십시오.”

 

“목사님, 언제나 저는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따라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네, 장로님. 하지만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십시오. 다만 제가 말씀드린 것이 주의 뜻에 맞다면 절 도와주십시오. 교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피아노 놓는 위치하나 바꾸는 데도 1년 걸린다고 하는데…… 아무튼 저는 목사님 편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편입니다.”

 

“네, 아무 걱정 마시고 시작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장로님.”

 

김이레 목사는 하장로 댁을 나왔다. 이제 비로소 첫걸음을 뗀 것이다. 창문을 열고 한강변을 달렸다. 주께서 지금 자신을 보고 무어라고 하실지 궁금해졌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있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하장로였다.

 

“목사님, 제발 떠나신다는 말씀은 다시 생각해보실 수 없겠습니까? 저는 두 분 목사님 말고 다른 분을 모실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얼마나 목사님을 모시려고 애썼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장로님, 장로님이나 저나 모두 주의 종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주만 섬겼으면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누가 누구를 섬긴단 말입니까? 그저 서로 사랑하며 피차 복종하며 서로에게 종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 어떤 사람은 논문 표절하고도 그 자리에 있고, 성추행을 하고도 계속 목회를 합니다. 법정에 구속되었는데도 징계는커녕 오히려 치유하고 감싸줘야 한다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목사님께서 이 시대 목회자들의 죄를 다 뒤집어쓰고 교회를 떠나신다는 것입니까?”

“그분들은 주께서 징계하실 테지요. 저는 주께서 저를 다루시기 전에 깨닫고, 돌이켜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더 이상 앉아서 주께서 심판하실 때까지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리를 비워두고 떠나야 합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주께서 분부한 것들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이 저와 같은 목사들의 소명입니다. 그저 큰 교회에 앉아서 왕 노릇하라고 저를 목회자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오, 주여. 우리 목사님만 같았으면 이 지경이 안 되었을 텐데.”

“아닙니다. 제가 주의 뜻을 모르는 소경입니다. 바로 내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진즉에 일찍 깨우치고, 주의 말씀을 들고 아골 골짜기로 떠났어야 합니다. 저는 돈 몇 푼 쥐어주고 늘 다른 사람을 보냈습니다. 주께서는 저에게 가라고 하시는데 말입니다. 저는 더 이상 이사야를 설교할 수 없는 파렴치하고 가증한 죄인입니다.”

 

“목사님, 또 제가 사탄 노릇을 했군요. 주의 뜻을 가로막고 나섰으니 말입니다.”

“장로님이 저를 아끼시는 마음에 전화하신 것 압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님이 은퇴하시려고 하니까 많은 장로들이 무릎 꿇고 읍소하며 은퇴를 만류했다는 무용담 아시지요? 그것을 선전하는 게 요즘 시대입니다. 그분이 휠체어를 타시고 설교해야 성도들이 모이고 은혜를 받는답니다. 그분만큼 능력 있고,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신 분도 없지요. 그리고 그분 뒤를 이을 만한 제2세대 목회자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분을 떠받들고 모실 수만은 없습니다. 그분을 더 이상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그분에게 그리스도의 자리를 가로채도록 부추겨서는 안 됩니다. 수십 만에 이르는 성도들을 책임질 지도자를 찾을 수 없다면 성도들이 흩어져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할 것입니다.”

 

“목사님, 점점 더 위험한 말씀만 하시네요.”

“그래서 장로님의 기도가 더욱 필요합니다.”

 

“오, 주여. 정말 저는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엄청난 일입니다. 정말 주께서 이루셔야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오, 주여. 내일부터 당장 특별새벽제단을 쌓아야겠습니다.”

“특별이라는 말은 빼시고 조용히 잠잠히 주께서 일하시는 것을 속히 보여주십사, 하고 기도합시다.”

 

“목사님, 정말 교회에서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네, 장로님. 저도 그렇습니다. 오늘 하루 잠깐 동안 말씀 나누었을 뿐인데 이렇게 이해하시니 정말 하나님 은혜입니다. 같이 싸워나갑시다.”

 

“목사님 아버님 같은 분을 친구로 두고, 목사님을 아들처럼 사귀었으니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수 없이 받았습니다. 또 마지막 천국 가는 길에 우리나라 교회를 위해 함께 싸우게 하셨으니 이 또한 얼마나 영광입니까?”

“네. 우리나라 교회 성도들이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김이레 목사는 벅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목회자의 입장과 장로들의 입장은 전혀 화합할 수 없다는 게 교계의 정설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연합하라고 하셨다.

 

정말 교회에서 성도와 성도가 연합할 수만 있다면, 목회자와 온 교인(평신도)이 서로의 입장을 완전히 내려놓고 서로 하나가 된다면, 아니 목회자가 자신이 성도 중 하나임을 깨닫고 자기 보좌에서 내려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성도들을 섬길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외에 다른 것을 부탁하신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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