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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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24)

by 브린니 2020. 8. 27.

진짜 교회 24

 

 

목회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근거렸다. 그들 가운데 대형교회 목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작 중소교회 목회자들이 대형교회 목사들보다 더 대형교회 시스템을 지지했다. 그들은 성공적인 목회에 대한 그들의 욕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 대형교회를 꿈꾸고 있으며 자신의 목회의 성공을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그와 달리 대형교회 목사들은 정확하게 반으로 갈렸다. 느헤미야 형제와 김영수 목사가 제기한 문제 따위는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심각하게 고민에 빠진 표정들이었다. 작은 교회들로 흩어져 지역을 섬기는 것이 한국 교회를 살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직 목회자들 자신에게 있었다.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교회를 일구었는데 하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영성은 예배드릴 때가 아니라 세속적인 일을 할 때 드러난다. 목회자가 설교할 때보다  영적인 교회를  운영하거나, 성도들과 친교를 나눌 때 더 잘 나타난다. 식사를 할 때나 운동 경기를 할 때 사람을 세우거나 내릴 때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나타내거나 절제하는 태도,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 목회자로서 책임과 권한을 어떻게 행사하는지, 성도들을 진정한 동역자로 세우는지 아니면 아랫사람을 부리듯이 하는지 등에서 판명되는 것이다.

 

목회자가 일상적인 일들을 처리할 때 그의 영성은 그의 인격을 통해 나타난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는 철저하게 우리 인격의 성숙도와 비례한다. 개인의 영성은 그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얼마나 빚어졌는가에 의해 판결된다. 예배나 집회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와 능력과는 무관하다. 인격이 빚어지기 위해서는 철저히 순복하면서 그리스도께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께 배운다는 것은 사람들을 통해 배운다는 뜻이다.

 

목회자들은 누구에게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갖가지 핑계를 대며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어떤 목회자들은 자신은 교회 부흥을 위한 세미나 등에 참석하며 늘 배우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부흥 전략을 듣고 그 정보를 활용하려는 것뿐이다. 진정한 배움이란 듣고 깨달았을 때 자신의 삶에서 적어도 어느 한 영역만이라도 바꾸는 것이다.

 

무엇보다 성령께서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목회자들은 우리만 설교할 수 있고, 우리만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 말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잘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충고하는 성도를 만나면 분노한다. 나를 가르치려는 동료 목회자들 만나면 참을 수 없다. 세상이 비판하면, 어떻게 타락한 세상이 경건한 목사를 욕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상대적인 우월감에 빠져 귀를 막는다. 또 누군가 이성적으로 옳은 말을 하면 인본주의라고 몰아세우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며 그의 입을 틀어막는다.

 

모세가 혼자서 백성들을 재판할 때 피로하자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는 70인의 장로를 세워 재판하게 하라고 충고했다. 모세 혼자 재판하는 것은 모세도 지치게 할 뿐 아니라 백성들도 힘들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모세는 그의 말을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했다. 그 결과는 좋았다. 모세와 백성 모두에게 유익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율법을 만드셨다. 모세가 모든 백성을 혼자 재판하다가 피곤하고 지쳤다면 신실하고 정직한 장로들을 세워 재판하는 것이 모세와 백성에게 모두 유익하다. 그러므로 이드로의 생각이 설령 인간적인 생각이었을지 몰라도 그것은 온 백성에게 유익했으며, 하나님께서도 이를 좋게 보셨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목회자가 다른 사람의 말을 겸허히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하는 일이 잦다면 그 목회자는 성경을 읽고 깨닫거나 기도의 응답을 받는 일에 둔감해질지도 모른다. 목회자들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 그런데 그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닫고 산다면 그는 결코 겸허하게 말씀을 받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면 이웃 앞에서도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말과 삶은 거짓이다.

 

오늘날 교회에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목회자들이 평신도에게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면 이를 절제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복종하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에는 후회가 없으시므로 평신도에게도 많은 은사가 나타난다. 이때 목회자가 이들을 자신의 동역자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이들의 은사가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물론 은사자들이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일들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은사를 경시하거나 은사자들을 핍박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갖지 못한 은사나 능력이 나타난다고 해서 시기하거나 질투하고, 이와 경쟁하거나 권위로 누르려고 한다면 그 뒤부터 성령의 은사나 능력이 교회에서 잘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김영수 목사가 단에 올랐다.

“저는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도 제가 섬기고 있는 OO교회의 원로 목사가 되지 않을 것이며 남은 목회 임기 3년을 서울에서 수백키로 다른 지역 작은 교회에서 마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원로 목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퇴직금과 연금을 포기하는 것이며, OO교회 목사라는 타이틀을 잃는 것이며, 은퇴 후 이러저러한 활동에서 버팀목을 잃는 것이다. 사람들은 개인 김영수보다는 OO교회 원로목사라는 타이들에 더 열광하는 것이다.

 

현재 교계 지도자 노릇을 하는 원로들은 은퇴했으나 아직도 OO교회 목사로 대접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 담임목사보다 원로목사를 그 교회의 진정한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만큼 대형교회 원로목사직은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영수 목사가 원로 목사 직위까지 버리겠다고 선언하자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이제 느헤미야 형제가 하신 말씀을 좀 더 이어서 해볼까 합니다. 저는 여러분과 똑같은 목회자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느헤미야 형제를 만나서 교제하면서 몇 가지 사실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같은 사실에 대해 해석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뻔히 보고 있는 사실조차 다르게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에 대한 해석이 다른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사실 자체가 달랐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망하게 되었다고 말들은 많이 하면서도 누구하나 우리가 왜 망하게 되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없다고들 합니다. 홍수가 났는데 물이 없어서 목말라 하듯이 텔레비전 인터넷 할 것 없이 말씀이 넘쳐나는 데 성도들은 말씀이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말씀이 왜 없는가? 깊이 생각해보셨습니까?

 

기도가 없다고 무슨무슨 기도회를 때마다 열고 있지만 우리의 기도는 메말라가고 있으며 기도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왜 기도하지 않는지, 왜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지 고민하십니까? 진짜 왜?

 

전도가 되지 않고, 부흥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왜 전도가 안 되는지 왜 부흥이 오지 않는지 진정으로 고민하십니까?

 

목회자들이 이렇게 많고, 그 목회자들이 새벽기도, 철야기도 때마다 부르짖고 있는데 왜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할까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말 우리가 목회자 본연의 임무를 다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배하고 교회 운영하고 심방하고, 기타 사회봉사 좀 하면 우리 할 일을 다 한 것입니까?

 

현재의 상황에 대해 우리는 진단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꿰뚫어보고 계신 분 있으신가요? 아무도 없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느헤미야 형제가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가 말하는 것을 일단 들어야 합니다. 그는 지금 이 시대를 깊이 고민했고, 나름대로 해답을 찾았고, 현실을 바꾸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저는 형제를 만나면서 우리 교회의 책임은 100% 목회자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역시 형제에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몇 번을 물었습니다. 그러다 최소한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형제가 목회자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왕노릇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가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교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성도를 그리스도의 양떼로 보살피고 꼴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추종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수만 명을 거느린 왕이나 장수처럼 군림하고 있습니다. 장로, 집사들은 아주 유능한 신하들입니다. 교회는 목사부터 각급 신분으로 서열화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사야 시대부터 종교 권력자들을 향해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무섭게 질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는 말씀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할 자들이 과연 누구일까요? 시장잡배일까요? 노숙자일까요? 감옥에 있는 죄인들일까요? 첫 번째 회개할 자들은 권력자들입니다. 권력자라고 하니까 국회의원 같은 정치하는 사람들인 줄인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야 말로 권력자들입니다. 국회의원들은 부패했다고 욕을 먹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을 권력에다 플러스 경건하다고 칭송까지 받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교 권력자들입니다. 이제 하루 빨리 권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권력이란 아들과도 나누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 모두가 자신을 칭송하고, 존경하고 따라야 직성이 풀리지 않습니까? 누구하나라도 목회자의 말을 그냥 흘려듣거나, 반기를 들거나 하면 가만 봐주지 못하고 설교를 통해 치거나 갖은 모략으로 교회에서 밀어냅니다. 교회에서는 그 누구도 소위 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는 아주 잘 짜여진 조직과 같습니다. 아주 일사분란합니다. 잘 훈련된 그리스도의 군대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에게 충성하는 사병들과 같습니다. 사실 목사를 따르는 무리들이지 성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우리 목회자들입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성도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신부들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었습니다. 그냥 교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무개 교회, 아무개 목회자를 따르는 아무개 교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도를 모두 다 교인으로 만들어 놓고 우리가 무슨 수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훔쳐서 자기 배를 불리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십일조 안 내면 축복 못 받는다고 협박할 게 아니라 목회자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떼들을 다 잡아먹고오리발 내미는 지금의 형국을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고 조직도 압니다. 성도를 교회 건물 짓는 데 돈대는 물주로 여기지 맙시다. 이런 저런 제도를 만들고 성도들을 억압하지 맙시다. 성도들을 교회 조직의 조직원으로 만들지 맙시다.

 

우리 목회자들은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해서 회개조차 잘 하지 않습니다. 돈 문제, 성적인 문제가 없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보다 더 큰 권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하나님과 가장 적대적인 죄를 짓고 있습니다. 바로 교만입니다.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겸손한 척 하지만 우리가 성도들을 대할 때 어떻습니까? 완전히 왕처럼 군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성도들과 형제처럼 지내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엔 더 이상 성령의 교통하심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교제할 때 성도들 가운데 교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영적인 데 골몰하지 말고 우리의 육적인 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재정은 건강하지, 부부관계는 좋은지, 가정은 화목한지, 정말 사랑과 행복이 넘쳐나는지 살펴봅시다. 우리 목회자들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꺼내놓고 하나씩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재정이 투명하지 못하거나 부부사이가 멀어져 있다거나 자녀들이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거나 이런 일들이 우리 속에 있다면 정말 심각합니다. 목회자 자신과 가정이 정말 주님 앞에 온전한지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문제를 밖에서 찾지 맙시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하나씩 점검해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꿔야 합니다. 잘못을 찾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고,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제발 이제 그만 똥 싸고 뭉개고 있지 맙시다. 뭔가 해봅시다. 문제를 찾아봅시다. 왜 우리가 망하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섣불리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문제를 제대로 찾았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대답하시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 찾으십시오.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문제를 서로 나누고 답을 같이 찾으십시오.

 

권력을 버리고 성도들과 형제처럼 어울리십시오. 성도들과 함께 교회의 문제를 찾고 그 중 하나라도 해결해보십시오. 설령 인간적인 행위라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찾고 바꿔나가십시오. 너무 영적인 척 경건한 척 하지 말고, 적나라하게 다 벌거벗고, 찾으십시오. 권력의 외투를 벗고, 성도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듣고, 배우고, 고민하고, 찾아서 고치십시오.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교회가 죽어가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에 목회자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나부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세미나는 여기서 일단락 짓고, 곧 다시 만나서 우리가 찾은 문제점들을 내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봅시다. 긴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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