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조용미 <햇빛 따라가다>
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명시 산책] 조용미 <햇빛 따라가다>

by 브린니 2020. 7. 11.

햇빛 따라가다

 

 

저물녘, 집으로 돌아오는 당신을

멀리까지 마중 나가보고 싶습니다

어스름이 깔린

집 근처의 나무들이 눅눅해지는 그곳으로

 

따스한 외투와 목도리를 두르고

차가워질 여윈 손은 주머니에 넣고서

조금 멀리, 당신이 오고 있을

푸른빛이 짙어서 깊어가는 어둑한 그 길을 따라

 

그런 날이 오겠지요

아마 오겠지요 그런 날을 기다린 줄도 모르게

 

햇살이 커튼 뒤에 불을 켜듯 화안하게

푸른 연꽃을 피워 올렸다 꺼뜨리는 저녁 무렵

하루가 열렸다 닫히고 또 열리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어쩌면 당신을 마중 나가는 일도 깜빡할 날들이

아마 오겠지요

그런 날들을 기다린 줄도 모르게

 

푸른 연꽃이 커튼 자락에

밤낮으로

세상에 없는 그 꽃들을 수미단에서처럼

크고 화안하게 피워 올리겠지요

햇빛이 그 일을 도와주겠지요

 

나는, 햇빛 따라가겠습니다

 

                               ―조용미

 

 

【산책】

저물녘, 집으로 돌아오는 당신을

멀리까지 마중 나가보고 싶습니다

 

그런 날이 오겠지요

아마 오겠지요 그런 날을 기다린 줄도 모르게

 

김소월의 노래 같은 느낌이랄까.

아마도 헤어져서 남의 집 사람이 되어 버린 어떤 남정네를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랄까.

혹은 죽음으로 생이별을 했을는지도.

 

기다리지 못하는, 기다릴 수 없는, 기다려서는 안 되는 사람을 기다릴 때

아, 그 심정은 어떤 것일까.

 

하루가 열렸다 닫히고 또 열리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어쩌면 당신을 마중 나가는 일도 깜빡할 날들이

아마 오겠지요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마음을 숨기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을 맞으러 나가는 일을 잊어버릴 수도 있을까.

기다리는 일이 가능한 날이 올 수도 있지만

마중 나가는 일을 깜빡 잊을 날도 올 수 있다.

아마도 삶은 잊고 살라고 하고, 그리고 잊는 일이 더 잦을 수도 있으리라.

 

햇빛이 그 일을 도와주겠지요

 

나는, 햇빛 따라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없이,

그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 없이

밤낮으로 다른 아름다운에 이끌리며 하루하루 잘 살아가는 일을

햇빛이 도와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햇빛을 따라……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간다면 다를까,

 

다만 햇빛을 따라가는 것이 어둠보다 더 빛나고 아름다우리라는 믿음

때문에

 

햇빛 따라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