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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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사진첩>

by 브린니 2020. 7. 10.

사진첩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트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야전 병원의 들것 위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무도회가 끝난 뒤 피로로 눈자위가 거무스레해진

저 황홀한 올림머리의 여인조차도

네가 아닌 댄스 파트너를 쫓아서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무런 미련 없이.

이 은판 사진이 탄생하기 전,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그 누군가라면 또 모를까.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폴란드, 1923-2012)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

 

 

【산책】

가족사진첩만큼 다양한 이야기 거리가 쏟아지는 게 또 있을까.

이땐 이랬지,

저땐 저랬지,

그땐 그랬지.

 

별의별 이야기가 다 쏟아져 나온다.

아주 오래된 사건부터

최근에 발생한 이야기까지.

 

가족을 넘어 친척으로 넘어가면 할 말은 더 많아진다.

명절에 사촌들이 다 모여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놓을라치면

밤이 아무리 깊어도 다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 가운데는 아주 슬픈 사연도 있을 것이다.

물론 기쁘고 행복한 것들도.

웃음이 터지는 상황도,

눈물 나는 스토리도 있다.

 

돌 사진,

결혼식 사진,

신혼여행 사진,

가족 야유회 등등

부모님의 은혼식, 금혼식 사진과 칠순, 팔순 잔치 사진들.

 

먼 나라로 여행을 다녀왔을 때 사진처럼 멋진 것도 없다.

 

너무 일찍 죽은 사촌형과 이모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의견을 내는 바람에

할머니 할아버지 일가친척들 다 모여서 수십 명이 가족사진을 찍은 적도 있을 것이다.

그때 누가 늦게 와서 사진에 빠졌다고 다들 한 마디씩 하기도 한다.

 

정말 다 있는데, 빠진 사람은 누굴까.

오히려 사진에 빠진 사람이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사진 한 장으로 남은 추억들이 너무나 많다.

그 추억들이, 그 과거의 시간들이

오늘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수많은 과거의 날들의 결과물이니까.

내일 다시 그 과거의 추억들을 꺼내놓으며 뭐라고 말들을 할까.

 

우리 가족엔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어.

감정이 좀 말랐다고나 할까.

이런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는 말한다.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을.

 

조금 다르고, 이상한. 아무것도 아닌.

 

*히로니뮈스 보스(네덜란드, 1450-1516) 네덜란드 출신의 플랑드르 화가. 20세기 초현실주의 선구로 평가받는 보스의 작품은 ‘광기와 부조리로 가득 찬 지옥도’라고 불리운다.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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