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것
눈에 뭔가 들어가 있다. 괜히 필요하지도 않은 눈물을 흘렸고 그것도 모자라 인공 눈물까지 샀다. 병원은 커다란 안경을 통해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유리 조각이 박혀 있다고 했다.
기다란 바늘이 눈으로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두려움을 움켜쥐는 사이, 눈은 수면처럼 출렁한다. 빛난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유리 조각이 바늘 끝에 끌려나오고 있었다.
눈 내리는 하얀 밤을 잊을 뻔하였고 그 거리의 무성한 힘들의 기억을 잃을 뻔하여서 나는 말했다. 그 유리 조각을 저에게 주세요. 병원은 작은 병 속에
유리 조각을 담아주었다.
조각은 날카롭기보다 푸르렀다. 박히기는 좋으나 찌르기엔 부족한 조각은 턱으로 밝기를 받치고 있었다. 여태까지 본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는 것은 살아온 것보다 본 것이 더 단단하리란 것을 믿기 때문일 것이나
유리 조각은 내가 본 모든 것을 가지고 갔다.
나는 불필요한 부위를 영원히 떼어내기라도 한 듯 모호하게나마 마음이 간절해졌다.
―이병률
【산책】
면도칼로 눈을 도려내는 장면이 나오는 흑백영화가 있다.
안달루시아의 개.
눈은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부위다.
눈은 1초에도 몇 번씩 감았다 뜨고 하면서 사물을 인식한다.
세분해서 말하면 눈은 보고 뇌가 인식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눈이 보고 인식하는 것으로 우리는 느낀다.
사람이 장애를 갖게 된다면 다른 어느 것보다 눈을 잃는 것이 가장 치명적일 수 있다.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암흑을 견딜 수 있을까?
단순히 보지 못한다는 것을 넘어서 텅 빈 어둠을 견뎌낼 수 있을까?
고구려 장수 양만춘 장군의 화살이 당태종의 눈을 찔렀다고 한다.
당태종은 한쪽 눈을 잃고 고통당하다가 임종을 앞두고 왕자들에게 다시는 고구려를 침범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화살은 눈을 찌를 수 있다.
이병률의 시 <내가 본 것>에서는 유리가 눈에 박혔다.
그러나 그 유리는
“박히기는 좋으나 찌르기엔 부족한 조각”이었다.
어쩌면 다행이다. 찌르지 못했기에 시인은 눈을 잃지 않았고, 살아 있다.
시인은 유리를 집으로 가지고 왔다. 병원에서 담아준 유리병 속에 넣어서. 마치 유골함처럼.
“여태까지 본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는 것은 살아온 것보다 본 것이 더 단단하리란 것을 믿기 때문”이다.
산 것보다 본 것이 더 단단하다?
기억 때문에?
기억은 본 것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기억에 남아 있는 본 것들.
본 것은 경험한 것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일까.
눈에 박힌 유리를 빼냈을 뿐인데
시인의 느낌은
“불필요한 부위를 영원히 떼어내기라도 한 듯”하다.
유리가 눈의 어느 부분과 마찰을 했고,
그것은 짧은 시간 눈의 일부, 몸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떼어내니까 마치 내게 있던 어느 부위를 떼어낸 것 같다.
몸속에 들어온 것들,
예컨대 많은 음식들,
하품을 하는데 들어온 벌레,
책상 모서리에 스쳐 손가락에 박힌 가시
목에 걸린 생선가시
혈관에 박힌 주사 바늘
링거
문신
기타 등등.
내 몸에 들어왔다가 나간 것들은 모두 나의 일부이다.
다만 불필요한 부위로 판단되어 잘려나갔을 뿐.
눈에 먼지나 티끌이 들어가
옆사람에게 후, 불어달라고 눈을 까뒤집었던 기억들,
떠오른다.
단단하다.
기억들.
*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 : 1929년 스페인의 거장 루이스 브뉘엘 감독이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각본을 써 연출한 단편영화로 브뉘엘의 연출 데뷔작이다. 스토리의 개연성을 무시하고 이미지의 연상 작용만으로 이루어진 실험적인 작품으로, 관객을 소외시킨 최초의 작품이자 브뉘엘의 초현실주의 성향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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