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병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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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병률 <사랑>

by 브린니 2020. 7. 13.

사랑

 

 

나는 가진 것보다

가지지 않은 것을 버립니다

 

나는 몸에 붙어 살찐 것보다

살찔 것들을 씻씁니다

 

나는 걸레로 닦은 것보다

걸레에 묻어날 먼지들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귀로 소리를 소화시키기보다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유인합니다

 

붙들리는 것을 금하였으므로

길 건너를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나는 몇 평입니까

 

물었습니다

나는 얼마입니까

 

물었습니다

이제 나는 가까이 있습니까

 

                                        ―이병률

 

 

【산책】

사랑은 내게 없는 것을 주는 것이다, 라고 라캉이 말했던가.

혹은 사랑은 그대 속에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라고 라캉이 말했던가.

지젝이 그걸 반복해서 말했던가.

 

아무튼 사랑은 ‘없는 것’과 연관이 있다.

내가 그대 속에 있다고 믿었던 것들, 사실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대가 그렇게 보인다.

그것이 나를 매혹한다. 그대에게 없는 것이.

 

나는 가진 것보다

가지지 않은 것을 버립니다

 

시인도 그걸 잘 아니까 이렇게 쓴 것일 게다.

내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버릴 수 있다니.

 

누군가로부터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내어달라는 요구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요구받는다면.

내게는 그녀에게 줄 사랑이 아무것도 없는데, 유독 그것을 달라고 하니

미칠 노릇 아닌가.

 

사랑은 당신 속에서 몇 평을 차지하고 있는가.

사랑은 당신 속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가.

사랑은 당신과 얼마나 가까운가.

 

당신 속에 있으니

당신의 일부가 되었는가.

 

그래서 당신도 사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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