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병률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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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병률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by 브린니 2020. 7. 12.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다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꽃 향은 두고

술 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집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신(神)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이병률

 

 

【산책】

누군가에게서 받은 꽃다발을 술 몇 잔에 잊고 주막을 나온다.

할머니가 들고 따라와 건네려는데 꽃이 할머니에게 더 어울리는 듯해서

차마 돌려받지 못하고 서둘러 떠난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그런 적 있다.

그 사람에게서 받은 것을 다른 사람의 집에 놓고 나온 날

그 사람에게서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고 만 날

그 사람은 누구였으며 다른 사람은 또 누구였는가.

 

사람과 날들.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날들.

 

그러나 단 한 사람,

바로 그 사람.

잊을 수 없는 날,

그날 하루.

 

언제나 시에는 슬픔이 묻어 있다.

그래서 시는 인생이다.

 

너에게서 나에게로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로

꽃이 넘어가고

사랑은 흐른다.

 

세월이 간다.

인생이 깊어진다.

 

슬픔은 더 짙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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