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다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꽃 향은 두고
술 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집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신(神)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이병률
【산책】
누군가에게서 받은 꽃다발을 술 몇 잔에 잊고 주막을 나온다.
할머니가 들고 따라와 건네려는데 꽃이 할머니에게 더 어울리는 듯해서
차마 돌려받지 못하고 서둘러 떠난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그런 적 있다.
그 사람에게서 받은 것을 다른 사람의 집에 놓고 나온 날
그 사람에게서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고 만 날
그 사람은 누구였으며 다른 사람은 또 누구였는가.
사람과 날들.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날들.
그러나 단 한 사람,
바로 그 사람.
잊을 수 없는 날,
그날 하루.
언제나 시에는 슬픔이 묻어 있다.
그래서 시는 인생이다.
너에게서 나에게로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로
꽃이 넘어가고
사랑은 흐른다.
세월이 간다.
인생이 깊어진다.
슬픔은 더 짙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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