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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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트라우마를 말하다

by 브린니 2020. 6. 25.

트라우마를 말하다

 

 

A는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상담실에서 환자들을 상담한 결과를 정리한 것들이었다. A는 외과 과장직을 그만 두고 상담실로 자리를 옮긴 지 1년쯤 되었다. 외과든 내과든 흉부외과든 주치의가 어떤 환자에 대해 정신과 상담을 병행하기를 원하는 경우 환자들을 상담실로 보내 A와 상담을 갖게 한다. 보다 원활한 진료를 위해서인데 환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올바로 인지하고 치료과정에 적극 협조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요즘 A는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집중 상담하고 있었다. 사람의 인생에 있어 어린 시절은 인격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인격이 온전히 형성되는 데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이 바로 트라우마다.

 

트라우마란 인생의 어느 한때 큰 사고나 사건을 당한 경험 때문에 그와 유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심각한 내적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외상外傷이라고 번역되는데 ‘깊은 내적 상처’라고 할 수 있다.

 

트라우마는 주로 어린 시절에 겪은 사건과 사고를 통해 무의식에 인지된 자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내적 상처이다. 문제는 트라우마가 사람이 성장하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어떤 장애나 일상생활에서의 어려움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적이 있는 사람은 유사한 상황에 처하면 심적 동요를 일으키기 쉽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빨리 뛰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면서 그 자리에 멈춰 설 수 있다.

 

또 누군가에게 심한 모욕을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게서 무시하는 듯한 말이나 행동을 당하면 온몸이 파르르 떨리면서 심한 분노가 일고, 소리를 지르거나 상대방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완전히 기가 죽어버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 있다. 이렇듯 트라우마란 크게 상처받은 경험이 유사한 상황을 만날 때 그때와 같은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유사한 상황이 아닐 때에도 트라우마를 떠올리면 고통당할 수도 있다.

 

트라우마를 반복해서 겪는 경우, 처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크게 고통을 느낀다. 그 다음에는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그 다음에는 자포자기하고, 그 다음에는 트라우마 속으로 도피하게 된다. 트라우마는 대체적으로 이런 패턴으로 반복된다.

 

A는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 가운데 트라우마 속으로 숨는 경우에 대해 적극적으로 상담하고 있었다.

트라우마 속으로 도피한다는 것은 트라우마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자포자기한 사람이 차라리 트라우마를 방어막으로 삼아 그 속에 숨는 것을 말한다. 트라우마가 자기 본모습이라고 느끼며 그 속에 들어가 숨는 것이 차라리 더 편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트라우마 때문에 대인관계가 어려운 사람이 나는 이런 트라우마가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느니 차라리 혼자 고독한 편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고독한 것이 매우 정당하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행복하다는 것은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과 별 탈 없이 잘 어울리며 사는 것에서 시작된다. 고독한 사람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트라우마 속으로 숨은 고독한 사람은 아주 당당하고, 자신이 혼자서도 잘 살고 있다고 믿는다(그렇게 착각할 뿐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봐, B, 이 친구가 쓴 것 좀 봐.

A가 보고서 한쪽을 내밀었다.

B는 소리 내서 읽었다.

선생님, 저는 굳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싶지 않아요. 그것을 위해 어떤 치료도 받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만약 제 다리가 썩어서 잘라내야 한다면 잘라내고 그냥 살래요.

 

B, 어떻게 생각해?

정말 재밌는 친구로군.

자네라면 뭐라고 답하겠나.

글쎄. 뭐, 이런 식? 자네가 다리가 아프다고 다리를 잘라낸다면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잘라내고, 심장이 아프면 심장을 도려낼 텐가. 자넨 지금 마음이 심각하게 아픈데 어떻게 하면 좋겠나. 잘래낼 수도 도려낼 수도 없는데.

B, 자넨 정말 문학적이야. 감성이 충만해. 하지만 이 친구는 환자야. 어떻게 해서든 치료를 해야 한단 말이지.

 

A, 무슨 걱정을 하나. 자넨 좋은 의사야.

내가 외과 의사 노릇을 할 땐 그렇게 믿었네. 많은 환자를 고쳤지. 수술을 하면 대부분 치료가 됐으니까. 그런데 상담실로 옮긴 후로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신이란 걸 수술할 수도 없고.

대개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은 모든 내면의 문제가 뇌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호르몬이나 약물 처방이나 아니면 수술로 고치려 들던데 자넨 아닌 모양이군.

 

물론 그런 식의 약물요법이나 수술도 필요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건 아주 중증이거나 꼭 필요할 때 그렇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아프고, 정신적인 장애를 호소할 뿐이야. 그럴 경우 약물이나 수술이 꼭 필요하다고 볼 순 없지.

그런데 단순히 마음이 아프고, 약간의 정신 장애를 호소하는 환자가 의외로 더 골치 아프다 그 말이군.

그래, 맞아. 바로 그거네. 정말 골치 아프지. 대부분 상담 치료를 해야 하는데 그게 치료된다고 확신할 수 없고, 좋아졌다고 해서 완치된 것도 아니니까 문제지. 요즘은 정말 마음이 있다는 게 싫어져. 몸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병들면 치료하면 되니까.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나?

단지 트라우마 때문이다, 라고 단정 지을 순 없겠지만 결국 트라우마가 발단이 된다고 말해야겠지. 트라우마란 결국 최초의 외상을 말하니까.

최초니까 한 번인 경험이란 거지?

그렇지.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이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단 한 번 경험에 그칠 수도 있지. 그런데 문제는 그와 유사한 상황이 다시 일어났을 때 문제가 생긴다 이거지. 아니, 어쩌면 그것과 별 상관이 없는 일에도 트라우마와 연관시키게 되는 게 문제야.

 

일부러?

아니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간다는 것이지.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자기도 모르는데 일부러 그런다?

그래 그게 이상한 거지. 뫼비우스 띠라고나 할까. 달리 말하면 자기는 절대 그러려고 하지 않는데 자기는 일부러 그렇게 해.

 

무슨 말인가 그게.

글쎄 말이야. 우선, 대체로 이렇게 돼. 어떤 사람이 있는데 트라우마를 겪고 난 뒤 그것을 잊지 못해. 자꾸 생각나고, 그것 때문에 숨을 못 쉴 정도야. 평생 그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반복적으로 곱씹을 수밖에 없어.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면 거의 죽을 듯하지. 근데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았는데도 그것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괴로워해. 시도 때도 없이 기억을 떠올리면서 울고, 분노하고, 소리 지르며 괴로워해. 그 기억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나중에는 일상생활조차 못할 지경에 이르지. 누군가 자신을 위로해야 한다고 느끼며 주변 사람을 괴롭혀. 심지어 그 기억이 떠오르지 않고 며칠 간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면 오히려 불안해져. 자기가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해. 그러다 다시 기억에 사로잡히고 괴롭게 되면, 그래 나란 존재는 평생 이렇게 살다가 죽을 거야,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아, 하고 생각하지. 이런 사람들은 늘 질질 짜.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떼를 쓰지. 주변 사람들이 아주 피곤해지지.

 

사람들은 대체로 과거에 당한 좋지 않은 경험들을 잊고 살지 않나.

그렇지. 그런 걸 다 기억한다면 제대로 살 수 없지.

망각이라는 신의 선물이 있지 않나.

대부분 사람들이 사건 사고를 망각하는데 지워지지 않는 경우도 있고, 더 심각한 건 아예 기억을 못한다는 거야. 충분히 트라우마적 사건인데 그 사실과 그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망각해 버리는 경우도 있어. 의식에서 기억을 완전히 삭제하는 경우지. 달리 말하면 자기 스스로 악몽 같은 기억을 무의식의 저장고에 깊이 숨기고 문을 잠가 버리는 식이야.

 

차라리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게 더 낫지 않을까.

문제는 의식은 기억 못하는데 무의식은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 그리고 무의식은 반드시 귀환하지. 다 잊었다고 생각하고, 기억조차 할 수 없고, 그런 경험을 했는지조차도 가물가물한데 어느 날 문득 선명하게 데자뷰를 보는 거야.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자기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어떤 이물감이 내면에 휘젖고 사라지는 거야.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왠지 익숙한 무엇이, 그러나 너무도 낯선 느낌이 나를 툭, 건드리고 잦아드는 거지.

 

A는 손을 휘저으며 무의식의 귀환을 알렸다.

B는 웃으면서 A의 팔을 치웠다.

 

A, 그런데 사람들이 트라우마가 반복해서 나타날 때, 그러니까 자기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그 무의식이라는 게 귀환할 때 그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나.

당사자가 알든 알지 못하든 트라우마가 내적 깊이 숨어 있는 경우 언젠가 밖으로 얼굴을 내밀게 되어 있지. 그런데 트라우마가 없다고 우기는 경우 무의식적으로 트라우마적 현상이 반복되더라도 쉽게 알아 차리지 못해. 트라우마는 전혀 다른 얼굴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릴 적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 다 크고 나서도 항상 사랑에 굶주린 표정으로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갈구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그를 향해 저 녀석은 애정결핍이야, 라고 말할 수 있어. 이 정도면 자기도 알고 남들도 다 아는 거지. 그러나 아주 멀쩡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가 도벽이 있거나 알코올이나 도박, 마약이나 섹스 중독이거나 연쇄살인범일 수 있어. 그런데 그렇게 심각한 상황에 내몰릴 때까지 그 자신은 모를 수 있다는 거야.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나.

그러니까 자기기만,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거지. 난, 아니야, 하면서.

아, 그래서 알코올 중독이나 뭐 기타 중독자들이 자신이 그렇게 될 때까지 계속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을 속이는구먼.

그렇지. 하지만 그런 중독 현상을 일찍 발견하고, 그것이 자신의 트라우마적 반복이라고 인정할 필요가 있어. 왜 자신에게 그런 중독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 원인을 찾고 거기서부터 해결책을 모색하는 거야.

쉽진 않겠군.

그래, 하지만 어릴 때부터 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치료할 필요가 있어.

 

그건 또 어떻게 하는 건가.

자, 부모가 일찍 이혼한 아이가 있어. 10살쯤 되었다고 해봐. 그 애가 작문 시간에 ‘간신히’라는 낱말이 들어간 짧은 문장 쓰기를 해. “엄마 아빠가 싸우는데 내가 간신히 말렸다.” 그 애는 이렇게 쓰지. 이 아이한테는 부모가 싸우고 이혼한 것이 트라우마가 된 거지. 글짓기 시간에 드러난 것이 사실로서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어. 그런데 그것 때문에 발생하는 다른 것들이 있지. 아이가 매우 똑똑하지만 매우 산만하고, 매우 잘난 척하고, 친구들과 잘 다툰다는 거야. 이것은 트라우마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 있지. 그 아이는 자기가 산만하고, 잘난 척하고 다른 아이들과 자주 다툰다는 걸 알지 못해. 다 자라고 난 뒤까지 알 수 없을지도 몰라. 인격이 다 형성된 후에야 뒤늦게 발견할 수 있고. 아무튼 1차 트라우마도 문제지만 그것 때문에 따라오는 것들이 있고, 그게 더 문제일 수 있다는 거야. 요즘 이혼한 부모를 갖고 있는 아이들은 많아. 그런데 그런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로 인해 그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하느냐, 어떤 인격이 형성되느냐가 중요하지. 아이가 산만한 경우 남의 말을 잘 듣지 못하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지. 똑똑할 수는 있겠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화합할 줄 모른다면 원만한 대인관계가 어려울 수 있겠지. 그로인해 그 사람은 여러 가지 아픔과 고통, 슬픔을 겪게 될 거야. 물론 주변 사람들도 그 사람 때문에 이런 저런 피해를 입게 되겠지.

 

자네 말이 맞아. 나도 이 나이가 되니까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조금씩 인지하게 되거든. 어떻게 해서 내가 이런 사람으로 성장했는지 잘 모르겠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사실 잘 몰라. 내가 나라고 믿어 왔던 게 실체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지. 자네는 가정이나 학교 교육을 받아왔고, 또 자네 스스로 지식과 교양을 습득했을 거야. 그리고 사회생활을 했을 테고. 자네는 자네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자네의 인격이, 자네의 성품과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는 정확하게 모르지. 어찌 보면 자네의 성품, 성격, 인격 뭐 이런 것들이 무의식에 의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커. 자네가 알고 있는 자네와 남들이 알고 있는 자네, 그리고 자네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지만 진짜 자네라는 사람의 인격이, 그러니까 실체 혹은 실재가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거야.

 

내가 모르는 내가 있고, 그것이 오히려 나의 진실일 수 있다는 거로군.

무의식을 다른 말로 내 속의 타자라고도 부를 수 있어. 내 속에서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녀석이지. 그래서 내가 아니라 남인 것처럼 느껴지는 타자야. 몽유병자가 자신이 잠든 사이에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트라우마를 깊은 무의식 속에 숨겨 놓은 사람일수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의 노예가 될 수 있어. 그래서 자기 자신을 더 알지 못하게 되는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데 그게 다 무의식의 발로라는 거야. 그것도 한번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반복적으로 그런 말과 행동을 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야.

 

이럴 수 있지 않나. 나는 그런 뜻으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닌데 남들은 나를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자네는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친구에게 비꼬는 말을 해. 친구가 화를 내지. 자네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해. 하지만 친구는 자네의 속마음이 그렇다는 걸 알아차리지. 뭐가 진실 같애?

친구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크겠지.

 

바로 그런 거야. 나는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해. 근데 그것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건 나의 의식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야. 무의식적으로 행동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더 진실에 가깝지. 내가 의식 못했거나 아니면 내가 기만했을 경우가 많아.

 

A와 B는 한동안 조용히 있었다. 왠지 숨 가쁘게 달려온 느낌이었다.

B는 커피를 계속해서 마셨고, A는 커피와 담배를 번갈아 마셨다, 뱉었다 했다.

 

다 좋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게 나의 딜레마지. 하하하.

A는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

우선 각 사람마다 자신이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어.

 

아니, 그걸 어떻게 살펴. 내가 이미 이렇게 된 걸.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기도 힘들잖아.

맞아. 그래서 상담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이유를 찾아 하나씩 하나씩 기억의 저장고, 그러니까 무의식의 잠겨 있는 창고의 문을 열어야 하니까.

 

그게 가능해?

그러니까 힘들다고 했잖아.

최면 같은 걸 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그냥 환자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을 더 선호해.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게 중요해. 그래야 자신이 뭘 숨기고 있는지, 숨기고 있는 실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니까. 혹은 뭘 왜곡하고 있는지. 기억은 정말 많이 왜곡되니까.

 

맞아. 똑같은 일을 두고서도 아내와 내가 기억하는 게 다르더라고.

그렇지. 사랑과 추억The Prince Of Tides이라는 영화가 있어. 옛날 영화지. 나도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야. 오빠가 여동생이 강간당하는 걸 목격했어. 그래서 항상 여동생을 끔찍이 보살피지. 아, 남동생인가 오빤가 모르겠네. 아무튼 그래.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서 강간당한 게 여동생이 아니라 오빠인지 남동생인지야. 사내아이가 어른 남자에게 강간당한 거야. 근데 그걸 부정하려고 여동생이 강간당한 것으로 왜곡하고 또 그걸 굳게 믿은 거야. 수십 년 동안.

 

와우. 인간의 정신세계란 정말 믿을 수 없군.

아무튼. 무의식의 저장소에서 진실 된 기억이 올라올 때까지 계속해서 상담을 해. 그리고 그것이 밝혀지면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찾지. 사건의 이유를 찾게 돼. 그럼 그 사건의 전모를 이해하게 되고 그 다음부터 거기에 대해 환자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묻는 거야. 사건 당시의 본인의 느낌이나 생각들, 그리고 지금 진실을 온전히 이해한 뒤의 생각들, 기타 등등. 이런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 하는 거야. 치료에 적합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정신과 의사들도 피곤하겠어. 상담료를 많이 받는 이유가 있었네.

지난한 노력이 필요해. 기다림의 시간이. 정말 진을 빼지. 우리는 흔히 미친 사람들만 정신과에 들락거리는 줄 알지. 아니야. 대부분 멀쩡해. 하지만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어. 자신이 알든 모르든. 남이 알든 모르든.

그래서 최종 단계는 뭐야?

글쎄. 최종이 있을까. 나는 요즘 한 가지 목표 비슷한 것을 세우게 됐어.

 

그게 뭔데.

자신이 자신의 인격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것. 지금 내가 어떤 인격체인가 알아보는 거야.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이유를 밝혀보자는 거야. 그것은 직업이 무엇이며 가족 관계가 어떤지 일상생활 모습이 어떤지 그런 것보다는 나 자체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보는 거야. 우리는 흔히 “성숙한 인격체”라는 말을 많이 써. 그런데 도대체 그 말이 무슨 뜻일까. 우리가 정말 성숙한 인격체인지 알아보자는 거지.

 

너무 추상적인 것 아닐까. 내가 어떤 인격체인지 알아보는 게.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건건당 트라우마를 극복해서 어쩌자는 거지. 물이 무서운 사람이 물이 무섭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에 무슨 영향을 끼치지?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지.

그러니까 자네 말은 개별적인 어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인격체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

그래, 우리가 정말 훌륭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얼마나 실망해.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이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얼마나 충격이 클까. 최소한 나는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하지 않겠어?

 

미운오리새끼 이야기가 생각나는구먼.

뭐, 그건 생물학적 정체성이기 하지만 아무튼 내가 진짜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나도 궁금해지는구먼. 내가 진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그걸 알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자꾸 꺼내놓아야 해. 그냥 덮어두면 안 돼.

반드시 무의식이 귀환하니까.

그래. 실재가 귀환하면 끔찍하게 무서울 수 있거든.

 

B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내가 알던 내가 아니고, 다른 무엇이라면, 그것도 아주 끔찍한 괴물이라면? 나는 무엇을 감추고 있을까.

 

나는 내 삶의 주체이다. 말은 쉽지만 내가 스스로 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예상보다 어려울 수 있다. 누군가 내게 아주 이익이 많이 남는 일인데 윤리적이지 않거나 비합법적인 일을 도모하자고 속삭일 때 망설이거나 유혹에 빠진다면 그것은 내가 내 삶의 주체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래서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그때 내가 뭐가 씌었지, 왜 그랬을까, 하고 그런 일을 한 것이 자신이 아닌 양 변명을 쏟아내는 것이다. 뭐에 씌이는 것, 무의식에 사로잡히는 것, 이것은 우리가 주체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

 

무의식을 명료한 의식의 장으로 데리고 나올 것.

 

B는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늘 A가 이야기를 주도해왔다. B는 자신의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게 B의 스타일이었다. 그것이 B가 사는 법이었다. B가 남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었다. A는 지금 B에게 자신을 드러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B는 만약 자신이 A에게 말하기 시작한다면 꽤 길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다음에…… 오늘은 늦었으니 다음에.

그것이 B의 방식이었다. 일단 미루고 보는 것. 이것 역시 뭔가 문제가 있다는 징후일 수도 있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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