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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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by 브린니 2023. 12. 24.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슬라보예 지젝의 책 <팬데믹 패닉>은 미국의 건축가인 마이클 소킨에게 바쳐졌다. 마이클 소킨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20203월 세상을 떠났다.

 

지젝은 이 책을 그에게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지만, 나는 믿지 않으련다.”

 

지젝의 이 말은 이렇게 들린다.

 

신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지만 나는 믿지 않으련다.’

 

보통 사람인 지젝은 친구가 죽어서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기독교적 무신론자인 지젝은 신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신이 없다고 믿는 것과 신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지젝은 약간 다르다는 것이다.

 

대개의 신자들은 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젝은 신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믿지는 않는다.

(물론 지젝의 정확한 생각은 잘 모른다. 다만 그의 책을 통해 그렇게 느낄 뿐이다.)

 

 

<팬데믹 패닉> 이 책은 지젝이 비교적 팬데믹 초기에 쓴 책이다. 그러므로 코로나 시대가 지나간 듯 느껴지는 현시점으로는 철지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젝이 제기한 문제는 현재도 진행중이다. 현시점 우리가 사는 현실과 지젝이 말한 문제들이 어떤 양상을 보이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나를 만지지 마라” (요한복음 20:17)

부활하신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다.

 

지젝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사랑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지고 돌보라.”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당신을 믿는 자들 사이에 사랑이 존재하는 거기에 임재하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며 만질 수 있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과 연대로 묶는 존재로 임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젝의 이 말은 현재 기독교인들이 지나치게 하나님을 향해 예배와 같은 종교의식에 몰두하는 것을 벗어나 이웃들을 사랑하고 돌봐야 한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팬데믹 기간 동안에 기독교인들은 예배를 사수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신천지 같은 사이비종교뿐만 아니라 정통 기독교 교회에서도 예배나 수련회 등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일들이 속출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한다면 예배를 사수하려다 이웃들에게 바이러스를 옮기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명을 전하는 종교가 이웃들에게 죽음을 선물해서야 되겠는가.

 

 

지젝은 나를 만지지 마라는 말씀을 손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닿을 수 없고, 오로지 내면을 통해 서로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는 코로나로 인한 육체적 거리두기가 타인들과 맺는 인간적 유대의 간절함을 오히려 튼튼하게 만들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희망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바이러스가 우리 사람의 기반들 자체를 흔들어놓을 것이며, 엄청난 양의 고통은 물론 대불황보다 더 극심한 경제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갈 길은 없고, 새로운 일상이 옛 우리 삶의 잔해들로부터 만들어지거ㅓ나, 이미 조짐이 선명하게 보이는 새로운 야만에 접어들게 될 터다.”

 

지금은 과학자들이 수년에 걸쳐 경고했음에도 우리를 아무 대비 없이 파국에 빠지게 만든 우리 시스템은 뭐가 잘못된 것일까?” 하고 다시금 돌이켜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지금 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다.

 

 

지젝은 말한다.

우리가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지금 유행하는 감염병이 자연의 우연성을 가장 순수하게 발현한 결과요, 그냥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아무 숨겨진 의미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습성에 일침을 놓으면서도 이 팬데믹 현상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부각한다.

 

이스라엘 총리는 팔레스타인 당국에 협조를 구했다. 한 집단이 감염된다면 다른 집단도 불가피하게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팬데믹이 끝나자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무자비한 보복을 자행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모두 다른 배를 타고 왔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코로나 시대에 이 말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러나 문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배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배에서 어서 빨리 내리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왜 늘 피로한가?

 

 

코로나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1 의료진과 요양보호사들처럼 기운이 다할 때까지 과로하고 있는 사람들

2 자신의 집에 강제적으로든 자발적으로든 격리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지젝은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들의 피로에 대해 말하면서 팬데믹으로 인해 피로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감염병의 결과들을 처리하는 사람들에게는 힘들고 소모적인 노동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 일은 공동체의 익을 위한 의미 있는 노동이고,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애쓰는 어리석은 노동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만족을 가져오는 노동이다.

 

그들의 피로는 보람 있고 값지다.

 

(코로나는 의료진들에게 십자가를 지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들이 대신 짊어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예수가 대속(代贖)의 삶을 살았다면 그들은 대고(代苦)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퍼펙트 스톰을 기다리며

 

 

지젝은 유럽이 자신들이 식민지들을 착취했던 역사를 반성하면서 개발도상국들을 돕는 식의 박애주의가 현재 시점으로는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더 가난한 국가에서 벌어지는 많은 고통이 유럽의 인종차별주의와 식민주의의 결과라는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에서 발원하는 죄의식에 호소하는 관용을 구하는 추상적 박애주의, 그저 인간의 얼굴을 한 채 기존 질서가 유지되길 바라는 입장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비참한 대응일 뿐이다. 지금은 그것 이상이 필요하다.”

 

지젝이 말하는 그것 이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바이러스의 사막에 잘 오셨습니다

 

 

지젝은 타란티노의 영화 <킬빌>에서 나오는 무술 용어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가해진 일종의 오지심장파열술이다. 이는 우리가 지금껏 걸어온 방식대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으며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다.”

 

지젝은 바이러스 감염병이 우리 자신의 몸을 비롯해 우리를 둘러싼 다른 사람 및 사물과 맺는 모든 기초적인 상호 교류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우리도 스스로를 통제하고 규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젝은 코로나가 야기한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것을 지적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선물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가족이 서로를 감염시키고, 직장 동료나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친구와 친척, 친지가 서로를 감염시키고 죽음으로 내몬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나 사회는 코로나로 인해 경제가 무너지는 것을 더 걱정하고 있다.

(물론 경제는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진짜로 걱정해야 하는 일이 이미 사망한 수천 명과 곧 죽게 될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시장이 공포에 떨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코로나가 세계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그 어느 때보다 더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메커니즘에 더 이상 좌우되지 않을 전 지구적 경제의 재조직화가 시급하다.”

 

그러므로 지젝은 경제를 통제하고 규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국민국가의 주권에 제한도 가할 수 있는 전 지구적 형태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지금 실질적으로 의료 전쟁 시국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젝은 옛날식 공산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공산주의가 도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감염병의 다섯 단계

 

 

1 부인 (괜찮겠지. 아무것도 아니야)

2 분노 (누구 책임이야)

3 타협 (최악의 상황만 피하면 돼)

4 우울 (이제 끝났어)

5 수용 혹은 반항 (일상에 충실하거나 시위에 참가)

 

우리가 받아들이고 감수해야 하는 것은 생명의 하부층위에 즉 죽지 않고 반복하며 유성생식을 하지 못하는 바이러스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하부층위는 항상 거기에 있어왔고, 어두운 그림자처럼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하면서 우리의 생존 자체에 위협을 가하고 가장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터져버릴 것이다. 이 바이러스 감염병은 우리에게 우리 삶의 궁극적 우연성과 무의미를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지젝은 이런 자연적 우연성에 의해 우리의 삶이 끝장날 수도 있으며 심지어 동시에 우리 인류가 이 종말에 부지불식간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데올로기 바이러스

 

 

중국에서 자신은 과잉보호하면서 감염병의 위험을 드러내놓고 깎아내렸던 인간들

체르노빌 사태를 두고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선전하면서 자신들의 가족은 재빨리 대피시킨 옛소련 공무원들

지구온난화를 공공연하게 부정하면서 이미 뉴질랜드에 저택을 구입했거나 로키산맥에 피난처를 짓고 있는 고급 관리들

이런 존재들에게 대한 대중적 분노가 이 위기의 뜻하지 않는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고 지젝은 말한다.

 

이번 장에서 밑줄 긋게 되는 글귀는 다음과 같다.

 

새하얀 마스크는 오히려 서로 알아봐야 하는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는 반가운 익명성과 해방감을 선사한다.”

 

“(코로나 때문에 격리되어) 낭비된 시간물러남의 순간, 놓여남, 풀려남은 우리 삶의 경험을 다시 활성화하는 데 결정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없이 바쁜 활동에서 놓여나 자신의 시간을 활용해 자신이 처한 곤경의 ()의미를 반추할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격리된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불안과 극심한 공포와 우울이었는지도 모른다.)

 

 

침착하게 당황하라!

 

 

공황 상태로 반응한다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기는커녕 위협을 사소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화장실 휴지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치명적인 감염병의 창궐 중에 중요하리라는 관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그냥 한번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에 대처하는 합당한 반응은 무엇일까? 그 감염병에 진지하게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젝은 현재의 위기는 어떻게 전 지구적 연대와 협력에 우리 모두와 우리 개개인의 생존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지역설하면서 조건 없는 연대를 통한 재발명된 공산주의가 필요하다고 다시금 주장한다.

 

 

감시와 처벌? , 좋아요!

 

 

<감시와 처벌>은 미셀 푸코의 책 제목이다. <감옥의 탄생>과 더불어 국가 권력이나 사회가 인간의 신체와 자유를 얼마나 억누르고 있는지 고찰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 우리는 여러 가지 새로운 규율을 강요받는다. 감염되어 격리되는 기간 동안 감시당하고 지침을 어기면 처벌받는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발하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은 감염병을 막기 위해 취해진 광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근거 없는 비상 조치들을 개탄하며 일상생활과 노동 활동을 중단시키며 진짜 예외 상태를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것을 당국의 예외 상태를 일상적인 지배의 패러다임으로 삼으려는 경향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젝은 감염병으로 인해 불가피해진 조치들을 푸코 같은 사상가들이 설파했던 감시와 통제라는 통상적 패러다임으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진짜 두려운 일은 국가가 감병을 다루고 봉쇄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데이터를 조작하고 은폐하는 일이라고 한다.

 

각종 음모론이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문제는 비록 삶이 어떤 식으로든 일상고 흡사한 것으로 돌아가겠지만 집단감염 이전의 경험과 동일한 일상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일상의 한 부분으로 익숙하게 대하던 일들을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며, 늘 위협에 시달리는 훨씬 취약한 삶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삶을 대하는 태도, 다른 생명체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 실존을 대하는 태도 전부를 바꿔야 할 것이다.”

 

(현시점에서 우리 삶은 코로나 이전과 얼마나 달라졌는가? 우리의 일상은 예전과 같은가, 아니면 매우 취약해졌는가, 일상으로 돌아와 안전하다고 느끼는가, 일상이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다고 느끼는가, 코로나의 후유증은 우리의 신체와 경제와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 남겼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영향을 끼칠 것인가.)

 

자연이 바이러스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메시지를 돌려주는 일이다.”

 

자연은 인류에게 말한다.

네가 나에게 했던 짓을 내가 지금 너에게 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지구에게 행한 못된 짓 때문에 자연이 죽어가면서 우리에게 보복하는 일이 더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측하듯 기후 문제는 전 인류를 더 이상 지구에 살 수 없도록 만들게 될 것이다.)

 

 

인간의 탈을 쓴 야만이 우리의 운명인가?

 

 

감염병이 몰고올 결과들에 대처하기 원한다면 근본적 사회 변화가 필요하다.”

 

나는 공공연한 야만보다 인간의 탈을 쓴 야만이 더 두렵다. 유감과 동정심도 곁들여져 시행되지만 전문가의 견해로 정당성을 얻는, 저 가차 없는 생존주의적 조치들 말이다. 우리 사회 윤리의 주춧돌인 노인과 약자의 치료를 축소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노인과 약자들이 죽어도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견해가 지배적일 경우 사회의 윤리는 밑바닥에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최우선 원칙은 경제 원리를 따지지 말고 조건 없이, 비용에 상관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돌봐야 하며 새로운 규칙들을 따라야 한다.”

 

개인의 책임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시스템 전체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더 큰 문제를 흐릿하게 만드는 순간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우리는 세 겹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의료 위기, 경제 위기, 심리적 위기.

 

위기의 시절에는 우리 모두가 사회주의자다.”

 

흔히 접할 수 있는 달콤한 말은 정치는 잊고 우리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진짜 정치가 필요하다.”

 

연대를 위한 결단은 대단히 정치적인 것이다.”

 

(정치는 인간의 삶을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는 영역이다. 연대할 것인가, 자기 살길만 모색할 것인가, 진짜 정치가 필요하다.)

 

 

공산주의냐 야만이냐, 아주 간단해!

 

 

우리와 야만을 가르는 분리선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지구를 뒤덮는 여러 전쟁을 계속하고 것이 완전히 정신나간 무의미한 일임을 차츰 깨닫고 있다.”

 

다른 인종, 문화, 성소수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태도는 우리가 마주한 위기의 규모에 비하면 얼마나 째째한 일인지 이해하고 있다.”

 

바이러스는 계획과 전략을 갖추고 우리를 무찌르려는 적이 아니라, 어리석게 자가증식하는 한갓 메커니즘일 뿐이다.”

 

우리는 인류를 자기파괴에서 구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이 치명적 위협을 통해서만 통합된 인류를 그려볼 수 있다.”

 

지젝은 팬데믹에서 희망을 본다.

치명적 위협을 통해 인류가 연대하는 새로운 공산주의의 탄생이 기대하는 것이다.

 

 

사마라에서의 약속 : 오래된 농담의 새로운 쓰임새

 

 

일어날 줄 알고 있던 일이 벌어진 것인데도 크게 충격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그 일이 생기리라고 정말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이러스에 최초로 보인 반응은 곧 깨어날 악몽으로 치부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일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며 바이러스의 세계에서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통스럽게 재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운명을 피하려는 시도가 없었다면, 운명은 저절로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일터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노동자를 근심하는 듯한 트럼프의 말이 거짓임을 알려준다.

 

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스스로 바이러스보다 가난을 더 큰 위협으로 느낄 만큼 끔찍한 상황에 놓여 있다.”

 

진짜 싸움은 어떤 사회 형태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신세계 질서를 대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질 터다.”

 

지젝은 팬데믹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어떤 희망?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지젝은 감염병은 우리가 육체적 존재에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상시시켜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완벽하게 고립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신체를 갖고 살고 있으며 역시 신체를 가진 다른 사람들과 살고 있다. 감염병은 우리가 가까운 이웃과 인접해서 살고 있으며 우리의 몸이 병들면 다른 사람들 역시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젝은 이를 통해 우리가 정치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자연을 망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개인, 자기 사회,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 말고 다른 것을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새로운 공산주의, 진짜 정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만 경제를 넘어 조건 없는 연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팬데믹 이후 우리의 삶이 이전과 전혀 다를 것이라고 말해왔다. 코로나가 잦아든 현시점 우리 삶은 어떻게 변화 되었을까?

대체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간 것에 안심하고 있다. 그런데 보이지 않게 우리의 삶은 코로나 이전과 다르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겉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이미 심각하게 손상되어 회복이 불가능한 게 아닐까.

 

우리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 하지도 않고, 어쩌면 결코 알 수도 없지만 코로나는 우리 삶을 아주 많이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다시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팬데믹은 건물로서의 교회, 제도로서의 교회, 예배드리는 장소로서의 교회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굳이 성도들이 한 장소(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신앙 모델인가?

 

초대교회의 가정 예배들처럼 이제는 가족 단위로, 이웃끼리, 소규모로 만나서 예배하거나 SNS로 예배하고 교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미 우리는 팬데믹 기간 동안 여러 인터넷 매체를 통해 교회가 아닌 집이나 제3의 장소에 따로 있으면서 같이 예배한 적이 많았다.

 

장소로서의 교회가 아닌 무형의 교회, 교회 건축이 필요 없는 교회, 더 나아가 전문적, 직업적 목회자가 없는 만인 제사장 교회, 이런 교회가 이미 도래한 것이 아닐까.

 

팬데믹은 이를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라는 장소에서의 연대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자체의 신앙만으로, 보이지 않아도, 많은 숫자로 모이지 않아도,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장소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영으로서의 교회!

(팬데믹은 교회라는 장소를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영의 교회를 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젝의 말을 바꾸면,

 

나를 만지지 마라. 대신 너희들 서로 사랑하라!

 

지나치게 나를 경배하려고 열을 올리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교회의 전력을 기울이라!

 

아직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팬데믹 시대, 혹은 코로나 이후 시대 우리 교회는 예배나 종교의식에 몰두하지 말고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은 종교의 개념을 뒤집은 사건이었다.

인간의 경배를 받아야 할 신이 인간을 위해 희생하고 대속한다는 것, 

신이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서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사실은 이웃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데 있다는 사실을 다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지젝은 조건 없는 연대, 그것을 재발명된 공산주의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들과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난을 당하는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조건 없는 사랑, 그것이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으나 외면해왔던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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