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 포세 <3부작 : 잠 못 드는 사람들> 2023 노벨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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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포세 <3부작 : 잠 못 드는 사람들> 2023 노벨문학상

by 브린니 2023. 12. 10.

욘 포세 2023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3부작

 

 1  잠 못 드는 사람들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는 매우 독특한 글을 쓰는 작가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의 작가라면 당연히 특이한 글쓰기를 감행하는 작가가 틀림없다. 그러나 욘 포세는 좀 더 색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딘가에 집중하고 몰입하고 있는데 그것이 평범하지 않다. 그는 거의 한 가지 목적지만을 바라보는데 거기가 어딘지 명확하지 않다. 장소가 아니라 그가 바라보는 곳은 생의 어느 지점인데 그것이 죽음인지 생인지 분명하지 않고, 사랑인지 아니면 사랑없음인지도 뚜렷하지 않다. 그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사랑은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은 것 때문에 아주 쉽게 부서진다. 어쩌면 사랑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뀌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랑이, 인간의 욕망이, 인간이 지향하는 모든 것이, 매우 절실하지만 삶에서는 그저 비껴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그것과 죽음을 바꿀 수도 있는 짙은 안개에 싸인 그 무언가가 포착되지 않고, 그저 유령처럼 떠돈다. 그의 작품 모든 부분에. 전체는 아니고 그렇다고 한 부분만도 아닌, 그저 모든 부분에서. 어쩌면 그것은 안개 속에서  운명이 다가오는 발걸음처럼 조용하지만 급박하고, 임박한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부작은 매우 재미있게 읽힌다.

 

3부작은

잠 못 드는 사람들

올라브의 꿈

해질 무렵

3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된 한 권의 책이다.

 

3편의 소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아슬레와 알리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다시 그의 딸로 이어지는 가계를 다룬다. 이 이야기는 인류에 대한 상징으로도 읽히며 밑바닥 삶을 사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싸움이기도 하고, 사랑을 지키기 위한 사투이면서, 사랑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해 부서지는 안타까운 이야기이기도 하며, 동시에 사랑이야말로 세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이어주고, 죽은자와 산자를 만나게 하는 영원한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잠 못 드는 사람들

 

줄거리

 

아슬레와 알리다는 방을 구하고 있다. 아슬레는 아버지가 물려준 바이올린과 함께 짐꾸러미를 들고 있었고, 알리다는 만삭이고, 금방이라도 아기를 낳을 것 같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와 큰도시 벼리번 거리를 걷고 있다. 그들에게 방을 빌려주는 사람이 없고, 벌써 몇 차례 퇴짜를 맞았다.

 

아슬레는 어부였던 아버지가 바다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얼마 전 어머니마저 여의고 혼자가 되었다.

알리다는 언니만 편애하는 어머니 밑에서 늘 구박덩어리로 살다가 아슬레를 만나 함께 살기로 마음먹는다.

 

두 사람은 아슬레의 아버지가 빌려 쓰는 보트하우스에서 살고자 했지만 그곳을 빌려주었던 선장의 아들이 찾아 두 사람을 내쫓았다. 선장의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으니 자기가 이곳에서 살아야겠다며 아슬레더러 집을 비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알리다는 여기 남아도 좋다고 말한다. (남편만 내쫓고 아내더러 남으라니 무슨 개소리인가.) 아슬레는 선장 아들을 죽여버리겠다고 흥분하지만 알리다가 그를 달랜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집을 빼앗기고 밖으로 나간다.

 

알리다는 끔찍하게 싫지만 어머니 집으로 가서 당분간 신세를 지고, 나중에 새집을 구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머니는 여전히 딸을 차갑게 대하면서 단지 며칠만 묵고 빨리 떠나라고 말한다.

 

알리다와 아슬레는 먹을 것과 약간의 돈을 훔쳐 어머니 집을 나선다.

 

아슬레는 섬을 벗어나 큰도시 가야겠다면서 배를 구해 오겠다고 말하고는 보트하우스로 간다.

 

아슬레는 배를 끌고와 알리다와 함께 고향을 떠나 벼리번으로 간다.

 

벼리번에서 두 사람은 방을 구하기 위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거절뿐이었다.

 

첫 집에서는 노파가 그들을 맞았는데 노파는 두 사람을 보고 비웃으며 집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핀잔을 주었다.

 

다음 집에서는 한 소녀가 나와서 남자에게는 방을 내줄 수 있지만 여자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 그 다음 집에서도 갖가지 이유를 대며 집을 빌려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길거리에서 잠이 든다. 아슬레는 아버지 시그발이 나오는 꿈을 꾼다.

 

어떤 남자가 나타나 여기서 잠을 자면 안된다고 그들에게 호통친다.

 

아슬레는 그에게 방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묻지만 그 남자는 두 사람을 감금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리고 여인숙으로 가보라고 말한다.

 

여인숙에 가서 방을 빌리려고 하지만 알리다는 여인숙 주인 남자의 시선을 불편하게 느끼고 그곳을 벗어난다.

 

거리를 헤매다가 두 사람은 집으로 들어가는 한 노파를 만나는데 그 노파가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문을 잡고 따라 들어간다.

 

노파는 그들을 경멸하면서 방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하지만 아슬레는 노파를 붙들고 알리다에게 부엌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알리다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알리다는 피곤해서 잠이 든다.

 

알리다는 죽은 아버지가 노래를 불러주던 꿈을 꾼다.

 

아슬레와 알리다는 부엌 침상에 누워서 잠을 자고, 또 잔다.

 

눈을 든 알리다는 산통을 느낀다. 아슬레는 산파를 찾아 나선다. 어제 만났던 남자를 다시 만나 산파가 있는 곳을 묻는다.

 

그 남자는 알리다가 누워 있는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는 산파가 집에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슬레는 다른 곳을 묻는다.

 

그 남자는 다른 산파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 아슬레는 그곳으로 가서 산파를 데려온다.

 

다른 산파는 알리다를 도와 아들을 받아낸다.

 

아슬레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을 시그발이라고 부른다.

 

 

책 속에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중간중간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특히 아슬레의 아버지 시그발과 아슬레가 바이올린 연주자로서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시그발은 자신의 아버지 아슬레, 할아버지인 시그발 역시 바이올린 연주가였다고 말한다. (이름이 반복된다. 시그발에서 아슬레로, 다시 시그발로, 그리고 아슬레, 또 다시 시그발로.)

 

연주자가 되는 건 우리 가문의 운명이야.”

 

그 운명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나는 슬픔이라고, 무언가에 대한 슬픔이거나 아니면 그냥 슬픔이라고 답할 게다, 음악 속에서 그 슬픔은 가벼워질 수 있고 떠오를 수 있게 되는 거고 그 떠오름은 행복과 기쁨이 될 수 있어, 그래서 음악이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나는 연주를 해야만 하는 거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겐 이 슬픔의 무언가가 남아 있는데 그게 수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듣는 걸 즐기는 이유야,”

 

운명은 슬픔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며 슬픔을 잊고 행복과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슬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동시에 음악을 즐긴다. 슬픔이 행복과 기쁨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슬픔 그대로 향유할 수도 있다.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연주자의 운명이라 그건 게지, 그렇지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신이 선사한 선물인 그 재능을 최선을 다해서 발휘해야 하는 거란다, 그게 인생이야

 

가진 것이 없는 사람(돈이 없거나 가난한 사람), 그러나 신으로부터 재능을 선물 받은 사람, 그런 사람은 최선을 다해 재능을 발휘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다. 그래서 슬프다? 운명은 슬플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주자의 운명은 비참하지,

늘 버려, 늘 포기해야 해,

그래, 떠나는 거다,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으로부터,

늘 너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라,

,

결코 자기 자신만이 전부여서는 안 돼,

늘 다른 사람이 전부가 되도록 해라,”

 

아버지 시그발은 그렇게 말했다.

너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늘 다른 사람이 전부가 되는 것, 이것이 연주자의 운명이고, 그것은 매우 비참하다.

 

아버지 시그발의 말은 아들 아슬레에게 잘 전달되었을까.

물론 아슬레 역시 연주자가 되지만 연주자의 운명이 고스란히 전해졌을까.

 

아슬레는 늘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어느 날 아슬레는 잔치에서 아버지가 연주를 쉬는 막간에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

 

그가 계속해서 연주를 하자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고

그는 터질 것 같은 슬픔을 몰아내고 싶고, 그 슬픔을 가볍게 만들고 싶다, 가볍게 만들고 들어 올려 무게가 없는 것처럼 둥둥 떠오르게 만들고 싶다,

그는 연주하고 또 연주한다

 

아슬레는 슬픔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연주한다. 그러나 그 슬픔이 그토록 가볍게 떠오를 수 있을까. 삶의 무게, 슬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가라앉지 않을까. 음악이 아무리 사람들을 춤추게 할지라도.

 

그렇게 되면 음악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위로 떠올라 그 자신의 세계를 연주하는 거고, 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듣게 되는 거야,”

 

첫 연주 자리에서 아슬레는 알리다를 만난다. 운명일까. 바이올린 연주가, 음악이, 그리고 슬픔이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일까.

 

그녀가 아슬레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는 울기 시작하며 아슬레를 두 팔로 끌어안는다 알리다가 곁에 가까이 앉아서 울자 그는 자신의 팔을 알리다에게 어설프게 걸쳐 그녀를 꼭 끌어안는다 그렇게 그들은 그곳에서 앉아 서로를 느끼고 같은 것을 듣고 있음을 느끼고 이제 함께 떠올라 날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아슬레는 자기 자신보다도 알리다를 더 보살펴 주고 싶다고, 세상에 좋다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주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느낀다

 

아버지 시그발이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전부가 되게 하라는 말은 아들 아슬레에게 알디라를 자기보다 더한 존재, 전부로 여기게 든다. 단 한 사람, 오직 알리다 만이 아슬레의 자기를 넘어서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욘 포세의 소설 3부작 중 첫 소설 <잠 못 드는 사람들>은 마치 스릴러 소설을 읽는 것처럼 긴장과 초조, 불안을 야기한다. 읽는 내내 뭔가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슬레와 알리다는 순수한 스무 살이 채 안 된 순수한 연인(부부)이지만 그들 앞에 있는 운명()은 뭔가 파국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언제나 다른 무엇이, 안개 속에서 어떤 위험이나 알 수 없는 적이 나타날 것만 같다. 운명이 그들은 지독한 슬픔으로 인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들이 새로운 사건이 발생할수록 점점 더 늪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다. 새로운 아기의 탄생마저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그리고

아슬레는 배를 어떻게 구할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은 어떻게 해서 어머니의 집에서 돈과 음식을 갖고 나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노파(산파)의 집에 살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들은 다음 소설에서 밝혀지리라.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의 소설에는 마침표가 없다.

왜 작가는 마침표를 찍지 않는 것일까. 대신 쉼표는 자주 찍혀 있다.

마침표 없는 쉼표, 단지 읽기에, 단락을 표시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쉼표를 찍은 것일까.

마침표를 찍지 않는 것은 한 문장이 끝나고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는 뜻일까.

 

운명 때문에 설령 죽음 닥치더라도 살아남은 자들의 삶은 계속된다는 뜻일까.

 

심지어 죽은 자의 삶도 산자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일까.

 

 

3부작은 2015년 북유럽 이사회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고, 이웃나라인 덴마크 일간지 폴리티콘으로부터 "500년 뒤에도 읽힐 수상작"이라는 평가를 들으면서 2023년 노벨문학상을 받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보인다.

 

이 소설은 인간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소설이라는 평을 얻었다.

 

이 소설의 첫 장면은 예수의 탄생을 모티브로 한 것일까.

 

아슬레와 알리다는 추운 겨울 비가 내리는 밤 방을 얻기 위해 거리를 헤맨다. 만삭이 알리다는 곧 아기를 낳을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 시그발이 슬프고 비참한 연주자의 운명을 말하는 장면에서

늘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다른 사람이 전부가 되게 하라는 말은 마치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질 때 신이 하신 말씀처럼 들리지 않는가.

 

늘 다른 사람에 베풀고, 다른 사람이 전부가 되게 하라.

 

그 사람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아슬레의 전부인 알리다, 그들 앞에 놓은 운명을 과연 슬픔 그 자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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